제주 역사인물 목사1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종윤 (李從允)과 이인 (李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이종윤

성명: 이종윤 (李從允)

본관(출신): 경주(慶州)

생존기간: 1431 ~ 1494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이다.
아버지는 이형(李衡)으로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낸
권명리(權明利)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을 거쳐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 내자시주부(內資寺注簿), 예조좌랑·정랑이 되었으며,
1470년(성종 1) 직언으로 인해 포항 장기(長鬐)로 좌천되었다가 2년 뒤인 1472년(성종 3)에 내직으로 들어가서,
1482년(성종 13)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고, 이어서 장령·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사옹원부정(司饔院副正)·.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489년(성종 20)에 다시 사헌부장령·집의에 올랐다.
1490년(성종 21) 8월, 허희(許熙)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94년에 12월 14일에 재임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김세균(金世鈞)과 김익겸(金益謙)이었다.

이종윤은 제주목사 재임기에 정사(政事)를 청렴간이(淸廉簡易)하게 하여 민관(民官)할 것 없이 그를 따랐으며, 만기가
되어 떠나게 되었으나 도민(島民)의 유임 상소를 요청하여 장기 근무 중 타계하니 도민이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하여 우러러보았다. 그는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정 간신의 처벌,
궁중(宮中)의 불사(佛事) 저지에 힘썼으며, 환관들의 농간을 막고,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 고리대금) 등을 탄핵하였다.
이후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와문집(松窩文集) 4권이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인

성명: 이인 (李인)

본관(출신): 벽진(碧珍)

생존기간: 1608 ~ 1669

인물상세정보

조선 후기의 문신. 현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야수(野수), 호는 소옹(蘇翁), 이조참판 상급(尙伋)의
아들이며 장유(張維)의 문하생이다. 1636년(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1642년 예문관 검열 · 봉교 · 전적 · 지평을 거쳐 1645년 필선을 지냈다. 1646년 개성경력(開城經歷)으로 나아가
부속(府俗)이 음사(淫祀)를 숭상하므로 이를 일체 금하였다.
1649 영암군수로 있을 때 민막십여사(民瘼十餘事)를 상소하여 모두 가납(嘉納)되었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영남의 재상(災傷)을 조사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토호와 독리(瀆吏)들을 철저히 규찰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구허날무(構虛捏無)되어 원성으로 정배 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났다.
1657년 성균관 직강 · 북청판관 · 1658년 사예 · 양양부사 , 1661년(현종 2) 정주목사(定州牧使)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 역관의 힘을 믿고 작폐하는 자들을 엄단하였다.
1664년 동부승지 · 정주목사. 1666년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즉 1667년(현종 8), 목사 홍우량(洪宇亮)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69년 9월 목사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이인이 목사로 부임하는 해에 본도는 큰 흉년이 들어 조〔粟〕만여섬을 들여와 진휼하였다.
수천섬이 남아 별고(別庫)에 저장하여 수해와 한해에 대비, 1668년 가락천(嘉樂泉) 동쪽 고령전(古齡田)에 있던
제주향교를 가락천 서쪽 옛 자리로 이설하였다. 이때 신찬(신찬)이 지은 「신향교이건기(新鄕校移建記)」가 전해진다.
또 망경루(望京樓)와 애매헌(愛梅軒)을 중수하고 1669년 영혜사(永蕙祠)를 장수당(藏修堂) 동쪽에 건립, 이약동(李約東) ·
이회(李禬) 두 목민관의 제향처(祭享處)로 삼았다.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병 2초(哨 – 2백명)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목사 김여수(金汝水)가 1초(哨 – 1백명)를 증원,
1668년 목사 이인(李인) 또 1초를 더 증원하였다. 이렇게 국방을 견고히 하고 또 진휼고(賑恤庫)를 특별히 설치하여
가경세곡(加耕稅穀)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진휼용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앞에 주진창(州賑倉)은 관덕정 서쪽에, 동진창(東賑倉)은 별방촌(別防村)에, 서진창(西賑倉)은 명월촌(明月村)에 있었다.
또 대정성 안과 정의성 안에도 각기 1개소가 있었는데 이 때 이인(李인) 목사에 의해서 진휼고를 하나 더 증설한 것이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조선인명사전(朝鮮人名辭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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