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역사인물 목사2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약동 (李約東), 이명겸 (李鳴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이약동

  • 성명: 이약동 (李約東)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1416 ~ 1493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초기의 문신.
성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호조판서에 증직된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ㆍ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ㆍ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이듬해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세조 14)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되어 재직할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 1486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ㆍ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는「노촌실기」가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470년(성종 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고 1473년 8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제수되어 떠나니 세상 사람들이 순량리(循良吏) 즉 명환(名宦)이라 칭했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하주(河澍)와 신계린(辛季璘)이다. 이로써 청백리로 녹찬(錄撰), 만기가 되어 섬을 떠날 때
의복ㆍ마필(馬匹)ㆍ제구(諸具) 등 관(官)에서 얻은 것은 모두 관부(官府)에 저장하고, 말 채찍도 관루(官樓)에 걸어두고
떠나니, 뒷날 도민들이 그것을 보물과 같이 간직하여 새로운 목사가 오면 바쳤다.
세월이 오래 지나 말 채찍이 좀먹어 떨어지니 화공을 시켜 그 채찍을 그려 관루에 걸어 청백리의 모범을 보이게 하였다.
또 목사직을 퇴임하여 돌아갈 때 배가 중양(中洋)에 이르자 제자리에서 맴돌아 사공들이 두려워했다.
한 비장(裨將)이“제주인이 공의 청덕(淸德)에 감격하여 금갑(金甲) 한 개를 선물로 드리려고 갖추었는데 혹 신명이 있어
공이(淸白)을 더럽힐까 하여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하였다.
공이 금갑(金甲)을 바다에 던지도록 명하니 잔잔해져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로써 그 곳을 가르켜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하였다. 재임 중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건립, 전에는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였는데 동사자(凍死子)가 많으므로 1470년 묘단(墓壇)을 삼의양봉(三義讓峰) 밑에 계설하니 그로부터
산천단(山川壇)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朝鮮時代) 전라도(全羅道) 의 감사(監司)ㆍ수령명단(守令名單) (전북편(全北篇)).

이명겸

  • 성명: 이명겸 (李鳴謙)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조선조의 문신. 세종ㆍ문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벽진. 이신지(이신지)의 아들. 1423년(세종 5) 문과 병과(丙科)에
급세하고 집현박사감(集賢博士監)을 역임하였다. 1449년(세종 31) 10월에 신숙청(辛淑晴)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51년(문종 1) 9월 첨지중추원사(첨지중추원사)로 전출되어 떠났다. 재임중 왜구가 침입하니 이를 잘 물리쳤다.
이에 앞서 1442년(세종 24) 7월, 이명겸은 제주경차관으로 도임한 적이 있어 제주도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장계에 신구 목장의 경작을 금하니 백성의 생계가 염려되어 한라산 일대의 목장과 옛 목장을 경작하도록 하고,
민생과 마정(馬政)을 병립하도록 요청하니 조정에서 윤허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나 1449년(세종 31) 8월,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이명겸(李鳴謙)이 하직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네가 근시(近侍)로 있은 지도 오래고 또
유신(儒臣)으로서 무재(武才)도 겸하니 내 이를 가상이 여기노라. 제주는 중요한 곳이다. 지금 마필이 많이 죽었다고 하고
또 공마(貢馬)의 체구도 심히 왜소해진다고 한다. 이전에 목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포치(布置)하고 만일 아뢸 것이 있으면 곧 보고하라.” 하였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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