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음식문화1

제주 음식문1화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도 음식중 갈치호박국, 꿩토럼과 꿩메밀국수, 자리회와 자리물회, 옥돔구이, 생선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음식문화1

제주의 음식문화는 섬지방의 특성이 베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합니다.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식문화정보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갈치호박국

갈치호박국은 낚시로 잡아올린 갈치 특유의 은빛이 반짝이는 신선한 갈치를 토막토막 썰어 펄펄 끓는 물에 넣은 후 늙은
호박과 풋고추, 배추 등을 넣고 여기에 마늘을 약간 넣어 소금간을 하고 나서 먹는데, 고운 고춧가루를 뿌려 약간 매운 듯하게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갈치는 9월∼10월에 많이 잡히는데, 이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하여 겨울이면 최고에 이른다. 하얀 갈치살이 쫄깃쫄깃 씹히는
갈치는 고소한 뒷맛이 일품이다. 갈치국은 갈치를 넣어 끓인 후 호박과 야채를 넣으면 더욱 구수한 맛을 낸다. 호박 대신 솎은
배추를 넣고 끓인 갈치국도 맛이 좋다.

꿩토럼과 꿩메밀국수

제주는 꿩이 많아 꿩요리의 종류도 많다. 꿩은 가을 꿩을 최고로 치는데 회로도 먹고 육포로도 만들어 먹는다.
꿩의 가슴살을 얇게 저며 샤브샤브식으로 먹는 ‘꿩토럼’은 별미다. 제주산 메밀과 꿩고기 육수가 어우러져 별미를 내는게
꿩메밀국수이다.
꿩메밀국수는 꿩고기 육수에 제주산 메밀로 만든 국수를 넣어 끓인 후 갖은 양념을 친 것으로 밀가루로 만든 음식에 비해
먹은 후 소화도 잘 되며 담백한 맛이 있어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 꿩만두국은 기름기가 없어 맛이 깔끔하다.

자리회와 자리물회

자리는 제주의 맛을 대표하는 바다고기로 제주도의 여름 식단에 반드시 오르는 명물 중의 하나이다. 자리는 자리돔이라
불리는 붕어만한 크기의 돔 종류로 칼슘이 풍부한 바다 고기이다.
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 근해에서 그물로 건져 올린다. 자리회는 지방, 단백질, 칼슘이 많은 영양식이며 물회, 강회, 자리젓,
소금구이 조림 등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자리물회는 비린내가 없고 시원하며 구수한 맛을 내는 특징 때문에 여름철
제주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

옥돔구이

맛이 은근하고 담백하여 한 번 맛본 사람은 누구나 다시 찾게 되는 옥돔은 제주도 연안과 일본 근해에서만 잡히는 어종이다.
제주에서는 주로 ‘생선’ 또는 ‘솔라니’라고 부른다. 11월~3월중에 잡은 옥돔을 넓적하게 펴서 햇볕에 반쯤 말린 후 참기름을
발라 구워먹는 옥돔구이는 그 맛이 일품이다. 옥돔은 영양가가 높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허약 체질이나 병후 회복기 환자들이
죽으로 끓여 많이 먹는다.

제주 음식문화 생선회

돔, 전복, 소라, 성게, 해삼, 문어, 한치, 멍게 등은 제주에서 제맛을 볼 수 있는 횟감이다. 이 중에서 횟감의 백미는 단연 돔이다. 갓돔은 바닷속 깊은 곳에 살면서 전복, 소라 등의 동물성 해조류를 먹고 산다. 그래서 살이 단단하고 쫄깃쫄깃한 반면에 값이
다른 돔에 비해 비싼 편이다. 갓돔 보다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횟감으로 즐겨 찾는 것이 황돔이다. 해조류를 먹고사는
고기인데 누런 바탕에 불그레한 비늘을 가지고 있다. 바닷고기 고유의 담백한 감칠맛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쫄깃함을 느낄 수
있다.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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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의복문화

제주 의복문화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도의 정당모자, 물옷, 우장, 봇태창옷, 대패랭이, 갈옷, 감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의복문화

제주의 의복문화는 섬지방의 특성이 베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합니다.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전통과 의복문화정보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정당모자

정당모자 이미지

댕댕이 줄기로 만든 모자야산에서 자생하는 댕댕이 줄기로 만든 모자로서 모자골은 사용자의 머리에 맞게 하고,
갓은 비교적 넓어서 해가림이 많이 되도록 하였다.
주로 목자나 농부들이 사용하였다.

제주 의복문화 물옷

물옷이미지

제주 해녀들이 입던 옷1970년대 초기 일본에서 검은 고무옷이 들어오기 이전에 제주해녀들이 입던 해녀옷이다.
해녀옷은 상의를 물적삼, 하의를 소중이, 머리에쓴 물수건을 포함한다. 해녀옷에는 제주여인의 근면성과 편리성과

합리성을 느낄 수 있다.
※ 해녀복 → 물옷 (민속연구원 김동섭)

제주 의복문화 우장

우장이미지

비를 가리는 비옷우장은 비를 가리는 비옷의 하나다.
띠를 곱게 손질하고 띠로 가늘게 새끼를 꼬아 지정된 틀에 맞게 제작하는데 띠가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빗물이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비바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이 이용도가 많았다.

봇태창옷(소중이)

봇태창옷(소중이)이미지

영아에게 약 1개월 동안 입히는옷봇태 창옷은 영아에게 약1개월 동안 입히는 옷으로서 홑겹이며 삼배를 이용한다.
소매는 손보다 길게 하고 허리는 트게 하며 옷고름은 실로 하는 데 자라나서 장수하도록 하는 뜻이다.
이 옷은 첫아이가 입고 나면 동생이 입기도 하고 동네에서 빌려 입기도 한다.

대패랭이

대패랭이 이미지

대나무를 세공하여 만든 모자제주에서 생산되는 대나무를 세공하여 만든 모자로서 차양을 넓게하여 햇빛을 가리는
면적을 넓게한다.
주로 하절에 이용하는데 통풍이 잘되도록 되었으며 무게가 가벼워서 남녀노소가 즐겨 이용한다.

갈옷

갈옷 이미지

풋감 즙으로 염색한 옷갈옷은 풋감을 즙으로 만들어 옷에 염색을 한 것이다. 빛깔은 적갈색, 흑갈색으로 처음에는
뻣뻣하나 자주 이용할수록 부드럽고 색감도 연해진다. 남녀노소가 가리지 않고 입는 활동적인 옷이며, 땀이 묻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모시로된 적삼과 바지에 감을 염색하여 착용하면 여름에는 더 없는 피서용 의류가 된다.

감티

감티 이미지

물가죽으로 만든 모자(가죽감투)
재료는 노루,오소리, 토끼 가죽등을 이용하여 태양없는 모자로서 털이있는 곳을
밖으로 나오게 하며 귀나지 않게 4각으로 만든다.
방한모로서 주로 목자들이나 고노들이 이용한다.
※ 가죽감투·감티 (의견:민속연구원 김동섭)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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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인물 목사2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약동 (李約東), 이명겸 (李鳴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이약동

  • 성명: 이약동 (李約東)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1416 ~ 1493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초기의 문신.
성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호조판서에 증직된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ㆍ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ㆍ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이듬해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세조 14)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되어 재직할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 1486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ㆍ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는「노촌실기」가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470년(성종 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고 1473년 8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제수되어 떠나니 세상 사람들이 순량리(循良吏) 즉 명환(名宦)이라 칭했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하주(河澍)와 신계린(辛季璘)이다. 이로써 청백리로 녹찬(錄撰), 만기가 되어 섬을 떠날 때
의복ㆍ마필(馬匹)ㆍ제구(諸具) 등 관(官)에서 얻은 것은 모두 관부(官府)에 저장하고, 말 채찍도 관루(官樓)에 걸어두고
떠나니, 뒷날 도민들이 그것을 보물과 같이 간직하여 새로운 목사가 오면 바쳤다.
세월이 오래 지나 말 채찍이 좀먹어 떨어지니 화공을 시켜 그 채찍을 그려 관루에 걸어 청백리의 모범을 보이게 하였다.
또 목사직을 퇴임하여 돌아갈 때 배가 중양(中洋)에 이르자 제자리에서 맴돌아 사공들이 두려워했다.
한 비장(裨將)이“제주인이 공의 청덕(淸德)에 감격하여 금갑(金甲) 한 개를 선물로 드리려고 갖추었는데 혹 신명이 있어
공이(淸白)을 더럽힐까 하여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하였다.
공이 금갑(金甲)을 바다에 던지도록 명하니 잔잔해져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로써 그 곳을 가르켜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하였다. 재임 중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건립, 전에는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였는데 동사자(凍死子)가 많으므로 1470년 묘단(墓壇)을 삼의양봉(三義讓峰) 밑에 계설하니 그로부터
산천단(山川壇)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朝鮮時代) 전라도(全羅道) 의 감사(監司)ㆍ수령명단(守令名單) (전북편(全北篇)).

이명겸

  • 성명: 이명겸 (李鳴謙)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조선조의 문신. 세종ㆍ문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벽진. 이신지(이신지)의 아들. 1423년(세종 5) 문과 병과(丙科)에
급세하고 집현박사감(集賢博士監)을 역임하였다. 1449년(세종 31) 10월에 신숙청(辛淑晴)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51년(문종 1) 9월 첨지중추원사(첨지중추원사)로 전출되어 떠났다. 재임중 왜구가 침입하니 이를 잘 물리쳤다.
이에 앞서 1442년(세종 24) 7월, 이명겸은 제주경차관으로 도임한 적이 있어 제주도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장계에 신구 목장의 경작을 금하니 백성의 생계가 염려되어 한라산 일대의 목장과 옛 목장을 경작하도록 하고,
민생과 마정(馬政)을 병립하도록 요청하니 조정에서 윤허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나 1449년(세종 31) 8월,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이명겸(李鳴謙)이 하직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네가 근시(近侍)로 있은 지도 오래고 또
유신(儒臣)으로서 무재(武才)도 겸하니 내 이를 가상이 여기노라. 제주는 중요한 곳이다. 지금 마필이 많이 죽었다고 하고
또 공마(貢馬)의 체구도 심히 왜소해진다고 한다. 이전에 목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포치(布置)하고 만일 아뢸 것이 있으면 곧 보고하라.” 하였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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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인물 목사1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종윤 (李從允)과 이인 (李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이종윤

성명: 이종윤 (李從允)

본관(출신): 경주(慶州)

생존기간: 1431 ~ 1494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이다.
아버지는 이형(李衡)으로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낸
권명리(權明利)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을 거쳐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 내자시주부(內資寺注簿), 예조좌랑·정랑이 되었으며,
1470년(성종 1) 직언으로 인해 포항 장기(長鬐)로 좌천되었다가 2년 뒤인 1472년(성종 3)에 내직으로 들어가서,
1482년(성종 13)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고, 이어서 장령·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사옹원부정(司饔院副正)·.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489년(성종 20)에 다시 사헌부장령·집의에 올랐다.
1490년(성종 21) 8월, 허희(許熙)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94년에 12월 14일에 재임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김세균(金世鈞)과 김익겸(金益謙)이었다.

이종윤은 제주목사 재임기에 정사(政事)를 청렴간이(淸廉簡易)하게 하여 민관(民官)할 것 없이 그를 따랐으며, 만기가
되어 떠나게 되었으나 도민(島民)의 유임 상소를 요청하여 장기 근무 중 타계하니 도민이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하여 우러러보았다. 그는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정 간신의 처벌,
궁중(宮中)의 불사(佛事) 저지에 힘썼으며, 환관들의 농간을 막고,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 고리대금) 등을 탄핵하였다.
이후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와문집(松窩文集) 4권이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인

성명: 이인 (李인)

본관(출신): 벽진(碧珍)

생존기간: 1608 ~ 1669

인물상세정보

조선 후기의 문신. 현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야수(野수), 호는 소옹(蘇翁), 이조참판 상급(尙伋)의
아들이며 장유(張維)의 문하생이다. 1636년(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1642년 예문관 검열 · 봉교 · 전적 · 지평을 거쳐 1645년 필선을 지냈다. 1646년 개성경력(開城經歷)으로 나아가
부속(府俗)이 음사(淫祀)를 숭상하므로 이를 일체 금하였다.
1649 영암군수로 있을 때 민막십여사(民瘼十餘事)를 상소하여 모두 가납(嘉納)되었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영남의 재상(災傷)을 조사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토호와 독리(瀆吏)들을 철저히 규찰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구허날무(構虛捏無)되어 원성으로 정배 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났다.
1657년 성균관 직강 · 북청판관 · 1658년 사예 · 양양부사 , 1661년(현종 2) 정주목사(定州牧使)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 역관의 힘을 믿고 작폐하는 자들을 엄단하였다.
1664년 동부승지 · 정주목사. 1666년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즉 1667년(현종 8), 목사 홍우량(洪宇亮)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69년 9월 목사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이인이 목사로 부임하는 해에 본도는 큰 흉년이 들어 조〔粟〕만여섬을 들여와 진휼하였다.
수천섬이 남아 별고(別庫)에 저장하여 수해와 한해에 대비, 1668년 가락천(嘉樂泉) 동쪽 고령전(古齡田)에 있던
제주향교를 가락천 서쪽 옛 자리로 이설하였다. 이때 신찬(신찬)이 지은 「신향교이건기(新鄕校移建記)」가 전해진다.
또 망경루(望京樓)와 애매헌(愛梅軒)을 중수하고 1669년 영혜사(永蕙祠)를 장수당(藏修堂) 동쪽에 건립, 이약동(李約東) ·
이회(李禬) 두 목민관의 제향처(祭享處)로 삼았다.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병 2초(哨 – 2백명)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목사 김여수(金汝水)가 1초(哨 – 1백명)를 증원,
1668년 목사 이인(李인) 또 1초를 더 증원하였다. 이렇게 국방을 견고히 하고 또 진휼고(賑恤庫)를 특별히 설치하여
가경세곡(加耕稅穀)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진휼용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앞에 주진창(州賑倉)은 관덕정 서쪽에, 동진창(東賑倉)은 별방촌(別防村)에, 서진창(西賑倉)은 명월촌(明月村)에 있었다.
또 대정성 안과 정의성 안에도 각기 1개소가 있었는데 이 때 이인(李인) 목사에 의해서 진휼고를 하나 더 증설한 것이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조선인명사전(朝鮮人名辭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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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4

제주 여성역사인물4 소개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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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근현대시기의 여성인물 김옥련과 김시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4

김옥련

성명: 김옥련

생존기간: 1909 ~ 9999

인물상세정보

김옥련은 1932년 1월 하도ㆍ종달ㆍ세화ㆍ우도ㆍ시흥ㆍ오조리 지역 잠녀 1천여 명이 참가한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1909년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서문동에서 1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물질에 나섰다. 제주섬 동쪽의
토지는 척박하기 그지없어 여성이라면 모두가 물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다.
한낱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노동의 가치에 대해 그녀는 야학을 통해 새로 자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1회 졸업생으로서, 오문규ㆍ문무현ㆍ부대현ㆍ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
근대적인 민족 교육을 받았다. ‘농민독본’ㆍ’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ㆍ한문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받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잠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해녀조합은 철저히 어용화되어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김옥련을 비롯한 잠녀들은 관제 해녀조합에 대항하여 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하여 갔다.
결국 1931년 12월부터 시작된 해녀조합에 대한 투쟁은 이듬해 1월 7일과 12일 오일장날을 이용한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1월 12일 시위에서 잠녀들은 세화리를 지나던 다구치 도사 일행을 향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일제 경찰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김옥련은 잠녀 주동자 부춘화ㆍ부덕량과 함께 검거되어 6개월 간 경찰서에서 고문과 취조를 받으면서도 항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녀가 주동한 제주잠녀투쟁은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대중의 항일운동으로서 한국사에서도 높게
평가된다.
작년 정부는 잠녀투쟁의 전면에 나선 그녀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함으로써, 비로소 이 투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김시숙

성명: 김시숙

생존기간: 1880 ~ 9999

인물상세정보

김시숙은 개항기인 1880년에 태어났다. 조천에서 태어나 일찍 시집갔으나 남자 못지않은 개성 때문에 결혼 생활은
실패하였다. 40세에 비로소 근대학문을 공부하여 신여성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25년 최정숙ㆍ강평국 등과 더불어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근대민족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천리에서는 야학을 열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일제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에서 재일여공보호회ㆍ재일여공노동소비조합을 조직, 여성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였다.
당시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 여성들은 방적공장 등에서 민족적 차별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권익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은 곧 민족운동이었고 제주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조천 출신 아나키스트 고순흠이 결성한 신진회에 가입하여 여성부 책임자를 맡아 항일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고순흠은 자신보다 13살 연상인 김시숙의 강한 성격과 의협심에 항상 존경의 마음을 가졌다.
1933년 김시숙이 오사카에서 54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향 조천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고순흠은 직접 묘지명을 지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 내용이 눈길을 끈다.
“재래의 불합리한 도덕과 윤리는 여자의 개성과 인권을 무시했다. 반역자는 탕녀라 하고 순종자는 열부라는 거꾸로 된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모순된 사회에서 진정한 열부라면 충실한 반역자 무리일 것이며 동시에 비참한 시대적 희생 계급이다.
어찌 부권 전제주의의 맹목적 현모양처주의에 복종할 수 있었으리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여성 김시숙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녀의 항일운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에게 시대적 모순과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실천적 표상이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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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3

제주 여성역사인물3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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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조선시대의 여성인물 강사철 아내 고씨와 홍윤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3

국지

성명: 국지 (國只,, 날아기)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국지는 품관 홍질의 첩인데, 14세에 시집을 가서 남편이 죽자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였으나 주위에서 만류하여 죽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재색을 탐내는 자가 강폭하게 겁탈을 하려고 하자 곧 남편의 형 집으로 거처를 옮겨 평생을 고독하게 수절하였으므로 인조 2년(1624) 5월에 목사 민기가 아뢰어 정표되었다. 비는 조천면 신촌리에 있다.

김천덕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조선 선조 때의 열녀이다. 애월읍 곽지리의 시노비 연근의 아내이다. 선조 때 제주판관 조인후가 제주목사 임진에게 천덕의 효열을 알리자 마침 제주에 왔던 아들 임제가 『김천덕전』을 지어 목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1577년 가문에 정려가 내려졌다. 김천덕은 재색이 있어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남편이 진상물을 싣고 출항 중 화탈도와 추자도 사이에서 침몰되어 익사하였다. 천덕이 3년상을 치르고 삭망과 절기마다 있는 제사 때에 화탈도를 향하여 하늘에 호소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굴렀다. 그 뒤 한 유배인이 그를 꾀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부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곽지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 또 명월방호소의 관리가 권세를 믿고 김천덕의 부친 김청에게 간청해 허가를 받아냈으나 천덕은 통곡하여 목을 매었으나 다른 이의 눈에 띄어 목숨을 구했다. 그러자 두발을 자르고 미친 척하니 천덕의 부친도 강요할 수 없었다. 백호 임제가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하고 아버지인 제주목사 임진에게 알리려고 제주도에 와서『김천덕전』을 지었으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3 김만덕

생존기간: 1739 ~ 9999

인물상세정보

김만덕은 1739년(영조 15년) 구좌읍 동복리에서 김응열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751년 돌림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자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으나 20세에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객주업에 손을 댔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물건을 위탁 판매하는 중간상 역할을 하던 곳으로, 그녀는 상업적 재능을 발휘하여 50대에
이르러 굴지의 재력을 발휘하였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출입하던 사회에서 그녀의 성공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조선 역사상 가장 주목받아야 할 여성사업가가 아닐 수 없다.
1794년(정조 18년) 무렵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제주도민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김만덕은 사재를 털어
육지에서 식량을 사들여 주민들을 구호하는 데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러한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졌고, 정조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때 평민으로서는 예궐할 수 없으므로
왕은 김만덕에게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의 직함을 제수하게 되었다. 이어서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김만덕의 전기는 1797년(정조 21년) 번암 채제공에 의해 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제가·정약용·이가환 등 당대의 쟁쟁한 실학자들이 김만덕의 선행을 기리는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김만덕은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던 변방 제주섬에 사는 천민 신분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사·농·공·상 중 말업(末業)으로
천시되던 상업을 통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재산을 환원함으로써 나라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했다.
그녀는 변방·여성·천민·상업이라는 최말단의 조건에서 국가·남성·양반·관료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했다.
또한 출륙금지령 하에서 제주 여성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육지 나들이뿐만 아니라 임금 알현, 금강산 구경까지 이루어낸
최고 경지의 인간사를 경험했다.
제주여성 김만덕은 제주 역사의 표상이며, 21세기 제주는 김만덕의 정신을 이어받는 문화적 적응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우리 역사에는 후세에 길이 남아있는 여성상들이 있다. 신사임당·유관순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김만덕은 또 다른 여성상, 즉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실현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를 묶는
봉건적 신분의 굴레에 도전했고, 상도(商道)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행에 처한 이웃을 위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인본주의자였다.
따라서 김만덕의 베풂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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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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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조선시대의 여성인물 강사철 아내 고씨와 홍윤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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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철 아내 고씨

  • 성명: 강사철 아내 고씨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고씨는 고산리 강사철의 처이다. 조선 철종 때 차귀 마을에서 출생한 고씨는 19세 되는 해 같은 마을에 사는
강사철과 혼인해 단란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남편이 용수 포구 건너에 있는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거센 풍랑으로 표류하고 말았다.
그의 처 고씨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해 식음을 하지 않고 시체나마 찾으려고 며칠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해안을
배회했다. 끝내 남편을 찾지 못하자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소복을 차려입고 용수포구 속칭 ‘엉덕동산’
숲에서 나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자 홀연히 남편의 시체가 이 바위 나무 밑에 떠올랐다.
고종 3년(1866) 판관 신재호는 고씨가 자결한 바위에 절부암(節婦岩)이라 새기게 하고, 관에서 강사철과 고씨 부부를
합장하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용수리민으로 하여금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만대에 기리게 하였다.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절부암은 열부 제주 고씨의 절개를 기리는 바위다. 이런 사연 때문에 제주를 찾는 신혼부부들은
이곳에 들러 백년해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홍윤애

  • 성명: 홍윤애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홍랑으로 잘 알려진 홍윤애의 가계는 고려 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로 고려시대에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대신을
배출한 높은 문벌이었다. 15세기 초 손자 홍윤강이 제주에 유배 온 이후로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방에서 향리를
지내는 정도로 몰락한 은사(隱士)의 집안이 되었다. 홍랑의 부친은 향리를 지낸 홍처훈으로 입도시조 홍윤강의 13세손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였다. 홍랑은 비록 몰락한 유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어엿한 풍모를
지니게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있었다.
홍윤애가 제주에 유배 온 조정철을 만나게 된 때는 1777년(정조 1)이었다. 조정철의 전 부인 홍씨는 이미 역적으로 몰린
친정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주인 내외는 조정철에게 새색시를 맞아들이도록 주선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싫다고 하면서
단지 심부름 해줄 사람만 구하겠다고 했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고매한 인품과 평소 언동에 대해 익히 듣고 있었으며, 제주에 유배 와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에 자처하여 심부름만 떠맡기로 하였다.
홍윤애는 조정철이 유배된 지 3년이 지나갈 무렵 1779년(정조 3) 겨울부터 적소를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홀아비가 된 젊은 청년이 홀로 있는 죄인의 집에 젊은 낭자가 출입하는 것은 세상의 이목을 끌 수가 있어 밤에
어둠을 타거나 이른 새벽을 이용하여 식사 장만과 빨래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그의 시중을 들었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동경과 존경으로 이루어졌고 은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맺어졌다.
이후 그들은 서로 그리움과 사무침에서 우러나 연인 관계로 진전하여 1781년(정조 5) 2월 30일 마침내 홍랑은
귀여운 딸을 분만하였다. 유배죄인을 사랑한 여인의 생애는 험난하고 천대받는 것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기쁘고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노론 4대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소론파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1781년(정조5) 3월 제주에 부임하였다.
노론파 조정철 집안과는 극한 대립하였던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철을 죽일 뜻을 갖고 죄상을 캐기 시작하였다.
조정철의 죄상이 드러나지 않자 집요하게 염탐하여 그의 적소를 드나들던 홍윤애를 잡아내게 된 것이다.
중략…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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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1

제주 여성역사인물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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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탐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여성인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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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시대 여성인물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 공주

  • 성명: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 공주
  • 생존기간: 9999 ~ 9999

상세정보

제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인들로서, 삼신인과 혼인하여 탐라국의 기틀을 잡고 농경문화를 전수한 인간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벽랑국 세 공주는 탐라국의 기원과 연관시켰을 때 건국의 모태가 되었던 제주여성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벽랑국 세 공주는 땅속에서 용출하여 수렵생활만 영위하던 남성 집단에 오곡(五穀)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갖고 들어와
새로운 문화혁명을 일으킨 여성 집단이다.
여기서 여성은 풍요와 생산을 가져다 준 주체로서 제주여성의 생활력과 문화를 전해준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당신화의 주인공 백주또 할망, 제주의 천지창조 설화의 설문대 할망 등에서도 여성의 독보적인
행위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탐라국 개국신화 내용

사람이 살지 않던 아주 아득한 옛날,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이들은 모흥굴,
지금의 삼성혈이라는 굴에서 솟아났는데, 맏이를 고을나, 그 다음을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그들은 용모가
의젓하고 기품과 도량이 넉넉하고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가죽옷을 입고 육식을 했으며, 언제나 사냥을 업으로
삼았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니, 자줏빛 안개가 나무 상자를 감싸고 상자는 해변에 떠내려 와 가지 않았다.
삼신인(三神人)이 산에서 내려와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새 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관대를 갖추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옥함을 지키고 있었다.
옥함을 여니, 그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셋 있었다. 나이는 십오륙 세쯤 돼 보였는데,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고,
기품은 그윽하고 얌전한데, 각자 화장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다. 세 여인이 옥함에서 나온 곳은 온평리 ‘화성개’라는 포구였다.
포구 이름은 이 여인들이 꽃상자 ‘화상(花箱)’에서 나왔다 하여 ‘화성개’라 지었다 한다. 삼신인은 “이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 세 사람에게 내린 것”이라 하며 기뻐했다. 사자는 고개를 두 번 숙여 절하며 말을 했다. “저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님께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시집 갈 나이가 되었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탄식을 하며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고량부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님을 모시고
가라고 명(命)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사자는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사자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 생긴 말의 발자국이 지금도 남았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이다.
삼신인은 곧 깨끗한 ‘희생’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하고 혼례를 올려 ‘흰죽’이라는
굴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고량부 삼신인이 결혼한 연못을 ‘혼인지’라 불렀다.
결혼하여 동굴에서 살던 이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샘물이 맑고 비옥한 땅을 구했고, 땅을 구하자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을 ‘활쏜디왓’이라 하는데,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지방기념물 ‘삼사석’이
그곳이다. 활을 쏘아 고을나가 좌정처로 정한 곳을 일도, 양을나가 정한 곳을 이도, 부을나가 정한 곳을 삼도라 했다.
그로부터 살림을 차려 오곡의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가축을 기르니 날로 풍요를 얻어 마침내 인간 세상 ‘탐라국’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 여성인물

정씨여인

성명: 정씨여인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정씨는 고려 공민왕 때 제주여인이다. 그녀는 목호(牧胡) 석방리보개(石邦里甫介)의 처로서 남편이 공민왕 23년에
일어난 목호의 반기와 이의 평정 와중에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정씨는 사별한 목호 남편 사이에 자식이
없는데다가 젊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탐라에 온 고려의 안무사와 군관들이 강제로 정씨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이에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칼을 당겨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여 강제 결혼을 막았다. 이후에도 정씨는 늙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조선 태종 13년(1413) 안무사 윤임은 정씨가 친족들도 재가를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절개와
부도(婦道)를 지켜서 70세에 이르렀음을 왕에게 아뢰어 열녀로 정표되었다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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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근현대사

제주근현대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근현대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근현대사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이 모두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 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 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관덕정전경 1

고종대로 넘어오면서 1목 2현의 행정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고종 원년(1864)에는 대정현과 정의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17년(1880)에 다시 현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유는 정의ㆍ대정 두 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제주목과 한 등급의 차이밖에 나지 않아 체계가 점차 문란해졌고 또 과거의 폐단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종 32년(1895) 5월에는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전국을 23개소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부(府)를 두었다.
이 때 제주도에는 23부의 하나로 제주부(濟州府)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목ㆍ부ㆍ군ㆍ현의 명칭과 부윤ㆍ목사ㆍ부사ㆍ군수ㆍ서윤ㆍ판관ㆍ현령ㆍ현감 등의 관직 명칭을
모두 폐지하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며, 고을 장관의 벼슬 이름을 군수(郡守)라 한다고 하여, 종래 부ㆍ목ㆍ군ㆍ현 등으로 번잡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을 모두 군(郡)으로 단일화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현ㆍ정의현이 모두 제주군ㆍ대정군ㆍ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제주부의 관청은 제주에 둔다고 하였다.

당시 제주부의 관찰사로는 처음에 경상좌수사(3품)로 있던 이병승(李秉承)이 주임관(2등)으로 임명되었고,
제주부 참서관으로는 외부 주사(外部主事)로 있던 유긍환(兪兢煥)이 주임관(6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때 제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고종 32년(1895) 7월 2일에는 중추원 의관(議官)
오경림(吳慶林)을 제주부 관찰사로 임명하고 칙임관(4등)으로 올렸다. 그리고 건양 원년(1896) 정월에는 제주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으나 동년 5월 4일에 관찰사직에서 면직되었다.
즉, 동년 동일자로 법부 형사국장 이병휘(李秉輝)를 제주부 관찰사로 임명하고 칙임관 4등으로 올렸으며, 5월 6일자로
제주재판소 판사를 겸임케 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23부제는 약 1년이 지나 폐지되고 곧 13도제를 실시하게 된다. 그 이유는 민정의 불편함과 번거로운
폐단이 있고 재정상의 부담도 크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건양 원년(고종 33년, 1896) 8월에는 전국 23부를 13도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제주에는 목사를 두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주는 섬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곤란할 뿐 아니라 나라에서 특별히 덕화(德化)를
베푸는 특수성으로 인해 목(牧)을 설치하여 대정·정의 두 군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다시 1목 2군 즉, 제주목과 대정군·정의군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중략…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근현대사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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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조선시대역사

제주조선시대역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조선시대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조선시대역사

조선시대역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제주목관아전경 1

제주도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1목 2현제가 정립된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호,
인구가 6만 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특히 牛馬賊)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한편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출륙한 제주도민, 즉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에 정착하여 사는 제주도민을 두무악(頭無岳)이라 하였다.
이른바 두무악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제주도의 공물과 부역이 증대되고 관부의
수탈이 격심해지면서 발생하였다.
산물의 부족으로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도민들이 과중한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 전라 연해지역으로 출륙하여 정착한 두무악들은 언어와 습속 등 생활양식의 차이로 그곳 주민들로부터 기피되었고,
또 정부로부터도 치안상 우려되어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이리하여 두무악들은 전복을 따는 일과 같은 진상용 해산물을
채취하여 납부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육지인과는 격리된 가운데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이들 두무악들은 수시로 원주지인 제주도로 추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육지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여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군역을 지면서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중략…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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