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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도 있는 가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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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유흥 협회와의 공조하에

피알 손님 유치 등 각종 시스템을 겸비하고

장사를 하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 있는 인사말 만큼이나 앞으로

오시는 식구분들도 자신감 가득히 오셔서

저희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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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신앙문화 포제단

제주 신앙문화 포제단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에서 포제를 봉행하는 장소인 포제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신앙문화 포제단

포제

제주에서는 마을별로 오곡풍등과 육축번성,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벌인다.
마을제는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사형식의 ‘포제’와 여성들이 주관하는 무속 제의인 ‘당굿’이 병존하고 있다.
‘포제’는 ‘을제’, ‘동넷제’, ‘거릿제[街祭]’, ‘치성제(정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당굿과 포제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조선시대 들어 유교식 제사의례가 도입돼 남성 주도의 포제로 분화, 독립되면서 나뉘게
된 것이다.
비록 포제가 유교적 의례를 따르고, 마을의 자치와 관련된 정치적 집회의 성격이 강화되어 있긴 하지만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등을 빌고 집안마다 무사하길 비는 축문(祝文)으로 보아 역시 당신앙(堂信仰)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포제단

포제를 봉행하는 장소를 ‘포제단’, ‘마을제단’, ‘포젯동산’이라 부른다. 포젯단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정하는데 흔히 동산(언덕) 위에 있는 곳이 많아 ‘포젯동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포제단은 장방형으로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현무암으로 된 장방형의 반석 제단(상석)을 설치해 놓은 것, 반월형 병풍 모양으로 돌담을 쌓고 그 가운데 제단을 설치해 놓은 것, 혹은 두 가지 형이 복합된 것으로 울담을 사방으로 설치하고, 제단 앞에 병풍모양의 돌담을 쌓아 놓은 형태가 있다.

포제단에 제물(祭物)을 진설(陳設)하는 상석(床石)은 하나이거나 둘 이상이 되기도 하는데, 상석의 수는 제사에 모시는 신격(神格)의 수에 따른다. 둘 이상의 상석을 갖고 있는 포제단인 경우 상석들을 한 울타리 안에 나란히 설치해 놓기도 하고, 울타리 안팎으로 나눠 설치하기도 한다. 제단을 울타리 안팎으로 나눠 설치한 까닭은 모시는 신격들의 위계 때문인데, 높은 신격은 울담 안 제단에 모시고 하위의 신격은 밖에서 의례하려는 의도다.

포제단도 당신(堂神)을 모셔 굿을 행하는 ‘당(堂)’처럼 신성한 장소로 여겨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불손한 행위를 삼간다.
그렇지만 ‘당’에서처럼 신의 상주처로 여겨, 그 안에서 허튼 소리를 하거나 불손한 행위를 하면 신이 노하여 질병을 준다는
믿음이나 다른 장소로 옮길 때 당내의 돌이라든지 헌납물의 일부를 옮겨 가야 하는 ‘옮겨 모심’등의 행위는 없다.
이것은 포제단이 신의 주처로서의 기능은 없고 단지 제장(祭場)으로서의 기능만이 있는 신성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을에 따라서는 포제단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제단이 없는 마을에서는 해마다 방위를 보아 ‘터진 방위’의 밭을 골라 임시 제장으로 삼거나 마을회관을 제장으로 삼기도 한다.

납읍리포제단

수산리포제단

현재 포제단

최근들어 마을제가 지역주민들의 향토애와 단합된 힘을 과시하는 전통문화유산의 하나로 자리매김되면서 일본침략기시대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허물어졌던 포제단이 새롭게 정비되고, 포제를 봉행하는 마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납읍리 마을제(포제)가 도(道) 무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신앙문화 포제단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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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거문화 신구간

제주 주거문화 신구간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에서 이사나 집수리를 비롯한 평소에 꺼려했던 일들을 손보아도 아무런 탈이 없이
무난하다고 하는 기간인 신구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주거문화 신구간

신구간

『신구간』은 大寒 後 5일에서 立春 前 3일간으로 대체로 제반神格이 천상에 올라가서 지상에는 신령이 없는 것으로
관념되고 있는 것 같다.

개념

제주특별자치도의 民間에 있어서 移徙나 집수리 따위를 비롯한 손질은 언제나 이 『신구간』이라는 기간에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신구간』은 大寒 後 5일에서 立春 前 3일간으로, 이 기간을 보통 일주일 정도가 된다.
그래서 이 신구간은 보통 新舊歲官이 交承하는 과도 기간을 뜻한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대체로 제반神格이 천상에 올라가서 지상에는 신령이 없는 것으로 관념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이 기간에는 이사나 집수리를 비롯한 모든 지상의 神的造化로 믿고 평소에 꺼려했던 일들을 손보아도 아무런 탈이
없어 무난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평상시에 그러한 일들을 저질렀다가는 동티가 나서, 그 집에는 큰 家患이 닥치고 厄運을 免치 못하게 된다고 하니, 날이 갈수록 일상생활에서는 미신으로만 돌려 버리던 이들까지도 이 俗信에만은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구간을 찾게 된 이유

우리의 생활 주거지를 중심으로 늘 우리의 생활과 관계 있다고 믿는 신으로서는 대개 본향 土圭官 한집을 비롯해서 성주신,
조왕신, 문전신, 토신, 신장(오방신장), 마두직이, 올래마두, 정살직이, 칙간임신, 나무벌목신, 석상신, 칠성신(칠성할망),
주먹지신(정주먹신) 따위를 지복하는데, 이는 일체의 지상신으로서 심방들은 地神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집밖의 신들로서는 「영감」이니, 「개로육소또」니. 「참봉」이니 혹은 배에 올랐다고 해서 「배옥성앙」이니, 큰 배에 올랐다는 데서 「상선앙」으로 말하는 「야채」와 「제석할망」(자청미신으로서 일명 중세경이라 함), 「상세경」(문두령神), 「하세경」
(정이 읏인 정수남 神), 「백중할으방」(農畜神), 「영등할으방」, 「산신백관」, 「요왕」(동의 청용신, 서의 백용신, 남의 적용신,
북의 흑용신), 중앙 요왕황제 수리태조국), 「거북소제(요왕의 차사 神임)」를 비롯해서 제주특별자치도 18,000이라는 온
神格의 이름은 다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 신구간을 이용하지 않고서 다른 시기에 조왕, 물류(門戶), 통시(변소), 쇠막(오양간), 집중창(집의 일부
분을 고침), 울타리 안에서의 흙 파는 일, 울담 고침(울타리 돌담을 고침) 나무짜름 따위의 일을 하면 동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티로 잘 아프게 되는 증상으로는 대개 다리아픔, 눈아픔, 머리아픔, 목아픔, 가슴아픔, 전신불구 따위로 그 아픈
증상이 한결같지 않게 나타난다. 특히 급한 동티가 생겼을 때는 심방을 청해다가 빌 사이도 없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조왕, 칠성, 변소 등의 동티는 대개 눈아픔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특별한 주의를 하여 이사나 집수리 따위는 반드시 이 신구간을 찾게 된다.
이것은 평상시에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 매우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신구간』에 한가지 조심할 일을 그 이사갈 곳의 方位만큼은 꼭 봐야 된다는 俗信이다.
그리고 이사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거기에는 그 이사에 중심이 되어 있는 긴요한 물품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사 갈 때의 뺄 수 없는 중심적인 요긴한 물품은 체와 푸는체(키)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민으로서는 대개 이사할 때에는 그러한 체와 푸는체만을 먼저 옮겨 버리면, 이사는 다 된 것이나 다름이
없고 나머지 살림들은 나중에 옮겨도 좋고 안 옮겨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에 따르는 긴요한 물품은 어떠한 경우에는 솥, 단지(요강), 체, 푸는체(키)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시 여기에 화로
한 개를 더 끼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대주가지를 끼워서 말하는 경우도 있으며, 여기에 다시 부부를 다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이상에서 이사갈 때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는 체, 푸는체(키), 솥, 단지(요강), 화로 등이며 사람으로는 대주와 부인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사끝, 상사끝이라는 속담이 있어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있듯이, 이사할 때의 잘못으로 생기는 흉험조화는 역시 체와 키에서 생긴다고 하니, 오늘날에도 이러한 俗信은 農漁村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신구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方位를 보고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방위란 『명삼살이 방위』와 『해삼살이 방위』를 뜻한다.
이러한 방위는 집안식구마다 다 보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으로 그집의 대주 한 사람만을 본다. 여기에서 『명삼살이』는 종신
막혀 있는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 『해삼살이』는 모든 사람이 다 저촉받는 것으로서, 이는 그 한 해만 지내면 그 방위는
트이게 되는 것이다.

『명삼살이』에 걸려 있는 방위에는 울타리 속에서도 못짓게 된다고 하거니와 다만 그 이사 가야 할 곳이 먼 곳이면 그러한
『명삼살이』는 무시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해삼살이에 걸렸어도 그곳으로 꼭 이사를 가야만 될 부득이한 경우에는 돌아서 가는 방법이 있다.
돌아서 가는 방법이란 가령 대주가 현재 북쪽에 살고 있고, 그 해의 해삼살이가 남쪽에 있어 그 곳으로 이사를 가야 될
경우라면 대주가 서쪽에나 동쪽에 가 2, 3주 가량 묵고서 그곳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삼살이인 경우는 돌아서
가는 방법도 허용되지 않는다.

신관.구관이 교대되는 기간

요는 이러한 신구간은 해마다 예외없이 찾아오게 마련이고, 이 기간에는 옥황상제의 임명을 받아 내려온 여러 神格들의
임기가 다 끝나게 되어 舊官은 옥황으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新官이 서로 부임해 내려오는 이른바 신관·구관이 교대되는
기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지상의 모든 신들이 일년간의 인간 세계에 있었던 온갖 일들을 옥황상제님 앞으로 총결산을 함과 아울러
그 일의 성과에 따라 새로운 임지로 발령도 받게 된다는 것인데, 그 기간이 꼭 일주일간으로서 보통 大寒後 5일에서 立春前
3일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주특별자치도민은 그렇게 여러 신들이 옥황상제에게로 오가고, 또 그 신들이 많은 일거리들을 처리하느라고
인간세계를 보살필 겨를이 없는 분망한 틈을 타서 그러한 신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쓰러져 가는 가옥을 다시 고쳐 세우고 또한
새로운 살림살이를 꾸며 온 것이다.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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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거문화 돗통시

제주 주거문화 돗통시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전통민가(傳統民家)에서 돗통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주거문화 돗통시

돗통시

‘돗’은 ‘돼지’의 제주어다. 제주의 ‘돗통시’는 변소와 돼지우리가 결합된 공간으로, 돼지는 인분(人糞)처리 뿐 아니라
거름생산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제주는 화산분출로 만들어진 섬이라 농토에 자갈함량이 많고, 흙의 함량은 한반도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의 땅은 투수율이 높아 물을 오래 함유하지 못하므로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는 한반도와 달리
밭농사에 주력했으며, 메마르고 척박한 밭을 기름지게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이 돗통시에서 생산되는
‘돗거름’의 이용은 경제적으로도 효과면으로도 밭효율성을 높이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통시는 부엌에서는 멀고 마당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대체로 안커리(안채)의 부엌과 반대쪽 울담에
붙여 축조했다. 우선 오물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너평 정도 땅을 지면보다 낮게 파고 바닥에 수시로
보리짚을 깔아 주었다. 돗거름은 인분과 음식물찌꺼기를 먹은 돼지의 배설물이 통시 바닥에 수시로 덧깔아주는 보리짚과
섞여 발효된 것을 말하는데, 오줌과 함께 제주 사람들의 밭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거름이었다.
힘이 세고 다혈질의 돼지가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울담을 의지해 돗통시 주위를 큰 돌로 단단히 쌓아 올렸다.
통시 안에는 돌을 오목하게 깎아 만든 ‘돗도고리’를 두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 등을 담아 먹였다.
돼지가 잠 자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공간엔 초가 재료인 새와 억새로 지붕을 덮었다.
변소공간엔 변을 볼 때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든 두 개의 길쭉하고 평평한 돌, ‘디딜팡’을 두어단 높게 설치하였고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돌담은 둘렀지만 지붕은 없었다.

참고문헌

  • 제주도(2003), 『제주관광메뉴얼 Jeju』.
  • 고광민(1999), 「제주인의 삶과 돌」, 『제주학』 제3호, 제주학연구소.
  • 고광민(2003), 『제주도 포구 연구』,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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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거문화 물통

제주 주거문화 물통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제주 전통민가(傳統民家)에서 돌담 두른 ‘물통’ (우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주거문화 물통

 ‘물통’ (우물)

화산섬 제주는 투수율이 높은 현무암이나 화산회토로 덮여있어 물이 귀했다.
그래서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솟아나는 해안가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용천수가 나지 않는 산간지역에서는 물통을 만들어 빗물을 받아뒀다 음용수로 이용했다. 이름하여 ‘봉천수’. 용천수가
샘솟거나 봉천수가 고이는 곳에 만들어진 돌담 두른 ‘물통’ (우물)은 늘 깨끗하게 유지됐다.
물통마다 쓰임새를 달리하는 등 물통에도 엄격한 질서가 있었는데, 섬사람들의 물에 대한 관념을 읽게 한다.

유수암천

북촌샘물

지금도 해안 마을을 중심으로 제주현무암으로 잘 정돈된 물통이 많이 남아 있고, 중산간 지역에도 지하수에서 샘솟는
물과 주민들이 합심해 파놓은 봉천수 등 이름난 물이 많다.
애월읍 유수암리는 물이 흐른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 지금도 이 마을에는 유수암천(流水巖泉)이 있는데, 이 물은 4·3때
마을 사람들이 떠나자 물이 솟지 않다가 사람들이 마을을 재건하게 되었을 때 다시 솟아났다는 이야기처럼 물이 사람살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유추하게 해준다.
주변을 돌담으로 두른 유수암천에는 매끈하게 깎은 돌을 이용해 만든 4개의 물통이 있다.
지하에서 솟는 물을 직접 받는 첫 번째 물통의 물은 식수나 제사용수로만 이용했다. 두 번째 물통으로 흘러 넘친 물은 음식물을 씻는 데, 세 번째 칸의 물은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용도로, 그리고 마지막 칸의 물은 마소가 먹는 물로 이용했다.

구시물

광령리마을물통

고려말 항파두성에서 몽고를 대적하던 삼별초가 이용했다는 유서 깊은 구시물도 유수암천과 같이 돌담을 둘러 보호했다.
구시물은 3개의 물통으로 나눠져 있는데 마실 물과 음식 씻을 물, 몸 씻을 물, 마소를 먹일 물로 구분해 썼다.
구시물을 사용했던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에도 안전했다는 역사기록은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물을 귀하고 깨끗하게 사용했고, 물을 신성시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오늘날 집집마다 수도가 설치돼 있어 물 귀한 줄 모른다. 게다가 정수기를 설치하거나 먹는 샘물이 나와 있어 깨끗한 물을
어려움 없이 마시고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물부족이 눈앞에 다가온 과제임을 상기해 볼 때 온고지신(溫故知新), 제주
선인들의 물 쓰는 지혜를 음미해 볼 때다.

참고문헌

  • 강정효(2000), 『화산섬 돌 이야기』, 각.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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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거문화 올레

제주 주거문화 올레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제주 전통민가(傳統民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구조 중 하나인 ‘올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주거문화 올레

올레

제주특별자치도 전통민가(傳統民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구조 중 하나는 ‘올레’다.
‘올레’는 주택의 진입로를 말하는데, 특이한 것은 제주에서는 집터가 한길과 접해 길을 향해 바로 문을 틀 수 있어도,
굳이 올레 공간을 만들어 그 안쪽에 집을 지었다.
올레는 2m 내외의 폭과 9∼15m 혹은 그 이상의 길이를 가졌는데, 긴 올레를 갖춘 집을 격이 있는 집으로 평했다.
그만큼 올레는 제주 민가 건축의 실용성과 심미성을 갖춘 필수 건축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올레목

올레는 완만한 곡선형으로 휘어돌아가게 만들거나 집터와 고저차(高低差)를 둠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 고유의 사적 공간으로서의 주택의 기능을 살려준다.
이러한 건축구조상의 배려는 ‘올레목’이라 부르는 지점에서 더욱 뚜렷하다.
‘올레목’은 길가에서 시작된 올레가 집마당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꺾이는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집안이 보이지 않으며 이 지점을 벗어났을 때 ‘개인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되므로 공ㆍ사의 결절점(結節點)이기도 하다.
이 곳에 ‘머문간’이나 ‘이문간’이 건축되기도 한다.

올레 양쪽에는 1.5∼2m 높이로 다듬지 않은 제멋대로의 돌을 척척 올려 돌담을 만들었다.
그래서 돌담 여기저기서 틈이 보인다. 이렇게 성글게 쌓은 돌담은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오히려 제주의 거센 바람에
강하다.
굽이쳐 도는 올레를 따라 쌓은 돌담은 집으로 들이치는 바람의 속도를 누그러뜨려 주택을 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해준다.

올레 어귀

올레 바깥쪽을 ‘올레 어귀’라 한다.
올레 어귀 양측 돌담은 보통 돌담과는 달리 큰돌로 쌓는데, 이 돌을 ‘어귓(귀)돌’이라 하며 주택영역의 시작임을 표시한다.
‘어귓돌’ 옆에는 말을 탈 때 디뎌 오르는 ‘ 팡 ’이 놓인다.
대문이 없는 경우에는 여기에서 약간 안쪽으로 대문 대용인 ‘정낭’이 ‘정주목이나 ‘정주석’에 끼워진다. 이 형식은 목축지대인
중산간지대 주택에 흔하다.
올레 가장자리에는 어귀부터 집안까지 유도하는 넓적하고 평평한 돌이 땅속에 박혀 있다.
우천시 진땅을 밟지 않기 위한 설치물로 징검다리처럼 띄어 있는 것은 ‘다리팡돌’, 연이어 있는 것은 ‘잇돌’이라 한다.

마을길이라는 공적(公的) 공간과 주택이라는 사적(史的) 공간을 잇는 올레는 ‘마을길-어귀-올레-올레목-마당’의 공간변화를
이루며 개방과 폐쇄의 완급을 보여준다.
여기에 사용된 각양각색의 돌들은 실제적 쓰임 못지 않게 올레의 표정을 만드는 건축자재로 부각된다.

참고문헌

  • 제주도(1998), 『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 제주도(1993), 『제주도지』.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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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거문화 초가

제주 주거문화 초가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특유의 건축양식인 초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주거문화 초가

초가

돌과 진흙, 그리고 새로 지어진 제주 초가(草家)는 제주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험한 자연조건을 이겨낸 제주 사람들의 지혜와 소박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한 울 안에 안거리와 밖거리 두 채의 집이 평등하게 배치된 ‘두커리집’은 제주 초가의 대표양식으로 꼽히는데 안거리는 부모세대가, 밖거리는 출가한 자녀가 거처하였다. 각 채에 부엌과 창고가 별도로 마련된 것은 부모와 출가한 자녀의 독립된 경제생활을 인정해 온 풍습에서 기인한 구조다.

초가의 형성 원인

제주가 바람 많은 섬이기 때문에 집의 건축 자재나, 구성, 구조에도 바람을 이겨내려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초가를 주위 지형보다 낮은 곳에 ‘웅크려 앉은 듯’ 낮게 짓고, 초가지붕도 모 없이 유선형으로 만들어 격자로 꽁꽁
동여맨 것도 그러한 궁리에서 비롯 된 것이다.
제주는 ‘풍다(風多)’일뿐 아니라 ‘우다(雨多)’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풍토하에 돌은 제주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와 바람에 강하기 때문에 건축외장재로 널리 사용됐다.
실제 제주의 대표 상징물의 하나인 ‘정낭’을 지탱하는 ‘정주석’은 원래 나무로 만들어진 ‘정주목’이었다.
고온다습하고 비가 많은 제주에서 땅속에 박아 둔 정주목은 밑둥이 쉽게 썩어 1~2년마다 교체해야 했다.

바람벽

돌로 만든 정주석은 이런 불합리를 한번에 해결해줬기에 정주목을 대신하게 됐다.
초가의 몸체인 벽은 다듬지 않은 큰 돌을 쌓고 짚을 섞어 반죽해 놓은 진흙을 채우며 난층(亂層)으로 쌓아 올려 만들었다.
제주에서 나는 흙은 화산회토이기 때문에 응집력이 약해 건축에 맞지 않다. 돌을 의지해 흙을 채워 놓음으로써 제주의 강풍과
풍우를 이기는 제주 특유의 ‘바람벽’을 완성하게 됐다.

안뒤

제주 초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본채 외에 성기게 쌓아 올린 울담 주변으로 ‘안뒤’, ‘우영’, ‘눌굽’, ‘통시’, ‘쉐막’ 등이 있다.
‘안뒤’는 안거리 뒷벽 양끝에서 울담까지 연결해 돌담을 쌓아 외부로는 출입할 수 없도록 만든 폐쇄적 외부 공간으로,
이곳으로의 출입은 오직 안거리 상방의 뒷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문 없는 마당이 열린 공간이라고 한다면, 담을 높게 쌓아 만든 ‘안뒤’는 외부와 차단된 ‘사적 공간’으로서 의의가 크다.
이곳에 동백나무, 감나무, 귤나무 등을 심어 후원처럼 사용했다.

눌굽

‘눌굽’은 눌을 누는 자리를 말한다.
‘눌’은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이나 땔감 등을 쌓아 놓은 낟가리를 말한다.
제주에서는 눌을 만드는 행위를 ‘눌을 눈다’고 한다.
이 눌을 누는 자리는 마당 한 켠에 마련되는데 우천시 침수를 피하기 위해 지면보다 40~50cm 높게 돌을 쌓아 평평한 단을
만들었다. 물 빠짐이 좋아 눌이 젖더라도 썩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우영

‘우영’은 집 울 안에 있는 텃밭으로 채소 등을 심어 부식을 얻는 장소다.
우영밭 둘레에 잔 돌로 낮게 담을 둘러 마당공간과 구분했고, 흙이 유실되는 것을 막았다.
큰 돌덩이를 쌓아 만든 통시는 변소와 돼지사육의 장소이며, 쉐막은 초가의 벽처럼 돌과 진흙으로 벽을 만들어 소를 키우고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이렇듯 전통초가는 비바람 심한 제주 기후를 이겨낸, 쾌적하고 합리적인 돌로된 주거양식 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일환인 지붕개량으로 전통초가는 사라져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성읍민속촌, 표선민속촌,
박물관 등지에 가면 초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주거문화 초가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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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음식문화2

제주 음식문화2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도 음식중 성게국, 전복죽, 몸국, 빙떡, 해물뚝배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음식문화2

성게국

성게는 5월말에서부터 6월 사이의 제주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제주에서 자연 서식되는 성게는 보라성게로서 껍질을
깨면 노란 살이 있으며, 달콤한 맛이 있고 단백질과 비타민, 철분이 많아서 건강식으로도 좋다. 제주에서는 성게를 ‘구살’
이라고도 불러 성게국을 구살국이라고도 한다.
성게국은 미역과 함께 참기름으로 살짝 볶은 후 오분자기를 넣고 국을 끓이면 성게알은 노란빛을 더하며 순두부처럼
엉키어 담백한 맛이 난다.

전복죽

조개류 중에서 가장 값이 비싸며 여름철에 특히 맛이 좋은 전복은 옛날 진시황이 불노장생에 좋다하여 널리 구한 것 중의
하나로서 제주 전복은 옛부터 그 명성이 자자해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전복은 체내흡수율이 좋아서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 등의 건강에 보양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복죽은 전복을 얇게 썰어 참기름에 살짝 볶은 후 물에 불린 쌀을 넣어 죽을 끓이면 뽀얀 국물과 재료가 어우러져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제주 음식문화2 몸국

몸은 원래 갈조류에 속한 모자반과에 속하는 바닷말인데 보통 모자반이라고 한다.
길이는 1-3m정도이며 가지를 많이 치고 줄기 밑둥의 뿌리로 바위에 붙어산다. 연한 것은 식용으로 이용하는데 제주에서는
몸을 된장에 무쳐먹거나 신김치에 버무려 먹기도 하지만 돼지 접작뼈를 달인 국물에 파를 썰어 넣고 신김치를 넣어 먹으면
돼지 고기국물의 느끼함 대신 구수하고 새콤하게 씹히는 김치와 해초맛이 어우러져 특유의 배지근한 맛이 난다.
잘 익은 멸젓과 봄철 나물무침이나 풋내나는 동지나물김치를 찬으로 곁들인다면 더욱 더 제주의 고유 맛을 느낄 수 있다.

빙떡

빙빙 마는 떡이라 하여 빙떡이라 부른다. 고운 메밀가루를 얇게 반죽해서 둥글게 전(煎)을 부친후 무, 당근, 파, 소금, 참깨가루, 참기름 등을 골고루 섞어 내용물을 만든 다음 전위에 올려놓아 둥글게 말면 빙떡이 된다. 빙떡은 통째로 손에 들고 먹는다.
여기에 좁쌀로 빚은 청주 한잔을 곁들이면 더할나위 없는 안주거리.

해물뚝배기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에는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다양한 요리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중적이면서 비교적 값이
싸 제주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중의 하나가 해물뚝배기이다.
된장뚝배기와 비슷하나 전복새끼라고 하는 오분자기와 조개, 성게알, 오징어, 새우 등 다양하고 신선한 해물과 두부, 쑥갓,
파 등 야채를 넣어 된장으로 맛을 내며 바다내음과 해산물에서 우러난 국물이 된장맛과 어우러져 시원한 맛을 내는데 그 맛이
별미이다.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음식문화2 소개 끝

제주도호빠 제주 음식문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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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음식문화1

제주 음식문1화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도 음식중 갈치호박국, 꿩토럼과 꿩메밀국수, 자리회와 자리물회, 옥돔구이, 생선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음식문화1

제주의 음식문화는 섬지방의 특성이 베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합니다.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식문화정보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갈치호박국

갈치호박국은 낚시로 잡아올린 갈치 특유의 은빛이 반짝이는 신선한 갈치를 토막토막 썰어 펄펄 끓는 물에 넣은 후 늙은
호박과 풋고추, 배추 등을 넣고 여기에 마늘을 약간 넣어 소금간을 하고 나서 먹는데, 고운 고춧가루를 뿌려 약간 매운 듯하게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갈치는 9월∼10월에 많이 잡히는데, 이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하여 겨울이면 최고에 이른다. 하얀 갈치살이 쫄깃쫄깃 씹히는
갈치는 고소한 뒷맛이 일품이다. 갈치국은 갈치를 넣어 끓인 후 호박과 야채를 넣으면 더욱 구수한 맛을 낸다. 호박 대신 솎은
배추를 넣고 끓인 갈치국도 맛이 좋다.

꿩토럼과 꿩메밀국수

제주는 꿩이 많아 꿩요리의 종류도 많다. 꿩은 가을 꿩을 최고로 치는데 회로도 먹고 육포로도 만들어 먹는다.
꿩의 가슴살을 얇게 저며 샤브샤브식으로 먹는 ‘꿩토럼’은 별미다. 제주산 메밀과 꿩고기 육수가 어우러져 별미를 내는게
꿩메밀국수이다.
꿩메밀국수는 꿩고기 육수에 제주산 메밀로 만든 국수를 넣어 끓인 후 갖은 양념을 친 것으로 밀가루로 만든 음식에 비해
먹은 후 소화도 잘 되며 담백한 맛이 있어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 꿩만두국은 기름기가 없어 맛이 깔끔하다.

자리회와 자리물회

자리는 제주의 맛을 대표하는 바다고기로 제주도의 여름 식단에 반드시 오르는 명물 중의 하나이다. 자리는 자리돔이라
불리는 붕어만한 크기의 돔 종류로 칼슘이 풍부한 바다 고기이다.
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 근해에서 그물로 건져 올린다. 자리회는 지방, 단백질, 칼슘이 많은 영양식이며 물회, 강회, 자리젓,
소금구이 조림 등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자리물회는 비린내가 없고 시원하며 구수한 맛을 내는 특징 때문에 여름철
제주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

옥돔구이

맛이 은근하고 담백하여 한 번 맛본 사람은 누구나 다시 찾게 되는 옥돔은 제주도 연안과 일본 근해에서만 잡히는 어종이다.
제주에서는 주로 ‘생선’ 또는 ‘솔라니’라고 부른다. 11월~3월중에 잡은 옥돔을 넓적하게 펴서 햇볕에 반쯤 말린 후 참기름을
발라 구워먹는 옥돔구이는 그 맛이 일품이다. 옥돔은 영양가가 높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허약 체질이나 병후 회복기 환자들이
죽으로 끓여 많이 먹는다.

제주 음식문화 생선회

돔, 전복, 소라, 성게, 해삼, 문어, 한치, 멍게 등은 제주에서 제맛을 볼 수 있는 횟감이다. 이 중에서 횟감의 백미는 단연 돔이다. 갓돔은 바닷속 깊은 곳에 살면서 전복, 소라 등의 동물성 해조류를 먹고 산다. 그래서 살이 단단하고 쫄깃쫄깃한 반면에 값이
다른 돔에 비해 비싼 편이다. 갓돔 보다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횟감으로 즐겨 찾는 것이 황돔이다. 해조류를 먹고사는
고기인데 누런 바탕에 불그레한 비늘을 가지고 있다. 바닷고기 고유의 담백한 감칠맛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쫄깃함을 느낄 수
있다.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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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의복문화

제주 의복문화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도의 정당모자, 물옷, 우장, 봇태창옷, 대패랭이, 갈옷, 감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의복문화

제주의 의복문화는 섬지방의 특성이 베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합니다.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전통과 의복문화정보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정당모자

정당모자 이미지

댕댕이 줄기로 만든 모자야산에서 자생하는 댕댕이 줄기로 만든 모자로서 모자골은 사용자의 머리에 맞게 하고,
갓은 비교적 넓어서 해가림이 많이 되도록 하였다.
주로 목자나 농부들이 사용하였다.

제주 의복문화 물옷

물옷이미지

제주 해녀들이 입던 옷1970년대 초기 일본에서 검은 고무옷이 들어오기 이전에 제주해녀들이 입던 해녀옷이다.
해녀옷은 상의를 물적삼, 하의를 소중이, 머리에쓴 물수건을 포함한다. 해녀옷에는 제주여인의 근면성과 편리성과

합리성을 느낄 수 있다.
※ 해녀복 → 물옷 (민속연구원 김동섭)

제주 의복문화 우장

우장이미지

비를 가리는 비옷우장은 비를 가리는 비옷의 하나다.
띠를 곱게 손질하고 띠로 가늘게 새끼를 꼬아 지정된 틀에 맞게 제작하는데 띠가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빗물이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비바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이 이용도가 많았다.

봇태창옷(소중이)

봇태창옷(소중이)이미지

영아에게 약 1개월 동안 입히는옷봇태 창옷은 영아에게 약1개월 동안 입히는 옷으로서 홑겹이며 삼배를 이용한다.
소매는 손보다 길게 하고 허리는 트게 하며 옷고름은 실로 하는 데 자라나서 장수하도록 하는 뜻이다.
이 옷은 첫아이가 입고 나면 동생이 입기도 하고 동네에서 빌려 입기도 한다.

대패랭이

대패랭이 이미지

대나무를 세공하여 만든 모자제주에서 생산되는 대나무를 세공하여 만든 모자로서 차양을 넓게하여 햇빛을 가리는
면적을 넓게한다.
주로 하절에 이용하는데 통풍이 잘되도록 되었으며 무게가 가벼워서 남녀노소가 즐겨 이용한다.

갈옷

갈옷 이미지

풋감 즙으로 염색한 옷갈옷은 풋감을 즙으로 만들어 옷에 염색을 한 것이다. 빛깔은 적갈색, 흑갈색으로 처음에는
뻣뻣하나 자주 이용할수록 부드럽고 색감도 연해진다. 남녀노소가 가리지 않고 입는 활동적인 옷이며, 땀이 묻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모시로된 적삼과 바지에 감을 염색하여 착용하면 여름에는 더 없는 피서용 의류가 된다.

감티

감티 이미지

물가죽으로 만든 모자(가죽감투)
재료는 노루,오소리, 토끼 가죽등을 이용하여 태양없는 모자로서 털이있는 곳을
밖으로 나오게 하며 귀나지 않게 4각으로 만든다.
방한모로서 주로 목자들이나 고노들이 이용한다.
※ 가죽감투·감티 (의견:민속연구원 김동섭)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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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인물 목사2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약동 (李約東), 이명겸 (李鳴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이약동

  • 성명: 이약동 (李約東)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1416 ~ 1493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초기의 문신.
성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호조판서에 증직된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ㆍ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ㆍ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이듬해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세조 14)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되어 재직할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 1486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ㆍ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는「노촌실기」가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470년(성종 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고 1473년 8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제수되어 떠나니 세상 사람들이 순량리(循良吏) 즉 명환(名宦)이라 칭했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하주(河澍)와 신계린(辛季璘)이다. 이로써 청백리로 녹찬(錄撰), 만기가 되어 섬을 떠날 때
의복ㆍ마필(馬匹)ㆍ제구(諸具) 등 관(官)에서 얻은 것은 모두 관부(官府)에 저장하고, 말 채찍도 관루(官樓)에 걸어두고
떠나니, 뒷날 도민들이 그것을 보물과 같이 간직하여 새로운 목사가 오면 바쳤다.
세월이 오래 지나 말 채찍이 좀먹어 떨어지니 화공을 시켜 그 채찍을 그려 관루에 걸어 청백리의 모범을 보이게 하였다.
또 목사직을 퇴임하여 돌아갈 때 배가 중양(中洋)에 이르자 제자리에서 맴돌아 사공들이 두려워했다.
한 비장(裨將)이“제주인이 공의 청덕(淸德)에 감격하여 금갑(金甲) 한 개를 선물로 드리려고 갖추었는데 혹 신명이 있어
공이(淸白)을 더럽힐까 하여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하였다.
공이 금갑(金甲)을 바다에 던지도록 명하니 잔잔해져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로써 그 곳을 가르켜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하였다. 재임 중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건립, 전에는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였는데 동사자(凍死子)가 많으므로 1470년 묘단(墓壇)을 삼의양봉(三義讓峰) 밑에 계설하니 그로부터
산천단(山川壇)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朝鮮時代) 전라도(全羅道) 의 감사(監司)ㆍ수령명단(守令名單) (전북편(全北篇)).

이명겸

  • 성명: 이명겸 (李鳴謙)
  • 본관(출신): 벽진(碧珍)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조선조의 문신. 세종ㆍ문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벽진. 이신지(이신지)의 아들. 1423년(세종 5) 문과 병과(丙科)에
급세하고 집현박사감(集賢博士監)을 역임하였다. 1449년(세종 31) 10월에 신숙청(辛淑晴)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51년(문종 1) 9월 첨지중추원사(첨지중추원사)로 전출되어 떠났다. 재임중 왜구가 침입하니 이를 잘 물리쳤다.
이에 앞서 1442년(세종 24) 7월, 이명겸은 제주경차관으로 도임한 적이 있어 제주도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장계에 신구 목장의 경작을 금하니 백성의 생계가 염려되어 한라산 일대의 목장과 옛 목장을 경작하도록 하고,
민생과 마정(馬政)을 병립하도록 요청하니 조정에서 윤허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나 1449년(세종 31) 8월,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이명겸(李鳴謙)이 하직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네가 근시(近侍)로 있은 지도 오래고 또
유신(儒臣)으로서 무재(武才)도 겸하니 내 이를 가상이 여기노라. 제주는 중요한 곳이다. 지금 마필이 많이 죽었다고 하고
또 공마(貢馬)의 체구도 심히 왜소해진다고 한다. 이전에 목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포치(布置)하고 만일 아뢸 것이 있으면 곧 보고하라.” 하였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왕조실록(王朝實錄), 이조실록,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역사인물 목사2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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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인물 목사1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탐라시대의 목사 이종윤 (李從允)과 이인 (李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역사인물 목사1

이종윤

성명: 이종윤 (李從允)

본관(출신): 경주(慶州)

생존기간: 1431 ~ 1494

인물상세정보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이다.
아버지는 이형(李衡)으로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낸
권명리(權明利)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을 거쳐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 내자시주부(內資寺注簿), 예조좌랑·정랑이 되었으며,
1470년(성종 1) 직언으로 인해 포항 장기(長鬐)로 좌천되었다가 2년 뒤인 1472년(성종 3)에 내직으로 들어가서,
1482년(성종 13)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고, 이어서 장령·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사옹원부정(司饔院副正)·.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489년(성종 20)에 다시 사헌부장령·집의에 올랐다.
1490년(성종 21) 8월, 허희(許熙)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94년에 12월 14일에 재임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김세균(金世鈞)과 김익겸(金益謙)이었다.

이종윤은 제주목사 재임기에 정사(政事)를 청렴간이(淸廉簡易)하게 하여 민관(民官)할 것 없이 그를 따랐으며, 만기가
되어 떠나게 되었으나 도민(島民)의 유임 상소를 요청하여 장기 근무 중 타계하니 도민이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하여 우러러보았다. 그는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정 간신의 처벌,
궁중(宮中)의 불사(佛事) 저지에 힘썼으며, 환관들의 농간을 막고,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 고리대금) 등을 탄핵하였다.
이후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와문집(松窩文集) 4권이 있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인

성명: 이인 (李인)

본관(출신): 벽진(碧珍)

생존기간: 1608 ~ 1669

인물상세정보

조선 후기의 문신. 현종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야수(野수), 호는 소옹(蘇翁), 이조참판 상급(尙伋)의
아들이며 장유(張維)의 문하생이다. 1636년(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1642년 예문관 검열 · 봉교 · 전적 · 지평을 거쳐 1645년 필선을 지냈다. 1646년 개성경력(開城經歷)으로 나아가
부속(府俗)이 음사(淫祀)를 숭상하므로 이를 일체 금하였다.
1649 영암군수로 있을 때 민막십여사(民瘼十餘事)를 상소하여 모두 가납(嘉納)되었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영남의 재상(災傷)을 조사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토호와 독리(瀆吏)들을 철저히 규찰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구허날무(構虛捏無)되어 원성으로 정배 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났다.
1657년 성균관 직강 · 북청판관 · 1658년 사예 · 양양부사 , 1661년(현종 2) 정주목사(定州牧使)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 역관의 힘을 믿고 작폐하는 자들을 엄단하였다.
1664년 동부승지 · 정주목사. 1666년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즉 1667년(현종 8), 목사 홍우량(洪宇亮)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69년 9월 목사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이인이 목사로 부임하는 해에 본도는 큰 흉년이 들어 조〔粟〕만여섬을 들여와 진휼하였다.
수천섬이 남아 별고(別庫)에 저장하여 수해와 한해에 대비, 1668년 가락천(嘉樂泉) 동쪽 고령전(古齡田)에 있던
제주향교를 가락천 서쪽 옛 자리로 이설하였다. 이때 신찬(신찬)이 지은 「신향교이건기(新鄕校移建記)」가 전해진다.
또 망경루(望京樓)와 애매헌(愛梅軒)을 중수하고 1669년 영혜사(永蕙祠)를 장수당(藏修堂) 동쪽에 건립, 이약동(李約東) ·
이회(李禬) 두 목민관의 제향처(祭享處)로 삼았다.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병 2초(哨 – 2백명)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목사 김여수(金汝水)가 1초(哨 – 1백명)를 증원,
1668년 목사 이인(李인) 또 1초를 더 증원하였다. 이렇게 국방을 견고히 하고 또 진휼고(賑恤庫)를 특별히 설치하여
가경세곡(加耕稅穀)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진휼용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앞에 주진창(州賑倉)은 관덕정 서쪽에, 동진창(東賑倉)은 별방촌(別防村)에, 서진창(西賑倉)은 명월촌(明月村)에 있었다.
또 대정성 안과 정의성 안에도 각기 1개소가 있었는데 이 때 이인(李인) 목사에 의해서 진휼고를 하나 더 증설한 것이다.

참고문헌

선생안(先生案),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 탐라기년(耽羅紀年),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국조방목(國朝榜目),
왕조실록(王朝實錄), 조선인명사전(朝鮮人名辭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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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4

제주 여성역사인물4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근현대시기의 여성인물 김옥련과 김시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4

김옥련

성명: 김옥련

생존기간: 1909 ~ 9999

인물상세정보

김옥련은 1932년 1월 하도ㆍ종달ㆍ세화ㆍ우도ㆍ시흥ㆍ오조리 지역 잠녀 1천여 명이 참가한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1909년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서문동에서 1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물질에 나섰다. 제주섬 동쪽의
토지는 척박하기 그지없어 여성이라면 모두가 물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다.
한낱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노동의 가치에 대해 그녀는 야학을 통해 새로 자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1회 졸업생으로서, 오문규ㆍ문무현ㆍ부대현ㆍ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
근대적인 민족 교육을 받았다. ‘농민독본’ㆍ’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ㆍ한문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받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잠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해녀조합은 철저히 어용화되어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김옥련을 비롯한 잠녀들은 관제 해녀조합에 대항하여 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하여 갔다.
결국 1931년 12월부터 시작된 해녀조합에 대한 투쟁은 이듬해 1월 7일과 12일 오일장날을 이용한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1월 12일 시위에서 잠녀들은 세화리를 지나던 다구치 도사 일행을 향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일제 경찰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김옥련은 잠녀 주동자 부춘화ㆍ부덕량과 함께 검거되어 6개월 간 경찰서에서 고문과 취조를 받으면서도 항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녀가 주동한 제주잠녀투쟁은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대중의 항일운동으로서 한국사에서도 높게
평가된다.
작년 정부는 잠녀투쟁의 전면에 나선 그녀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함으로써, 비로소 이 투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김시숙

성명: 김시숙

생존기간: 1880 ~ 9999

인물상세정보

김시숙은 개항기인 1880년에 태어났다. 조천에서 태어나 일찍 시집갔으나 남자 못지않은 개성 때문에 결혼 생활은
실패하였다. 40세에 비로소 근대학문을 공부하여 신여성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25년 최정숙ㆍ강평국 등과 더불어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근대민족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천리에서는 야학을 열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일제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에서 재일여공보호회ㆍ재일여공노동소비조합을 조직, 여성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였다.
당시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 여성들은 방적공장 등에서 민족적 차별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권익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은 곧 민족운동이었고 제주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조천 출신 아나키스트 고순흠이 결성한 신진회에 가입하여 여성부 책임자를 맡아 항일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고순흠은 자신보다 13살 연상인 김시숙의 강한 성격과 의협심에 항상 존경의 마음을 가졌다.
1933년 김시숙이 오사카에서 54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향 조천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고순흠은 직접 묘지명을 지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 내용이 눈길을 끈다.
“재래의 불합리한 도덕과 윤리는 여자의 개성과 인권을 무시했다. 반역자는 탕녀라 하고 순종자는 열부라는 거꾸로 된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모순된 사회에서 진정한 열부라면 충실한 반역자 무리일 것이며 동시에 비참한 시대적 희생 계급이다.
어찌 부권 전제주의의 맹목적 현모양처주의에 복종할 수 있었으리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여성 김시숙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녀의 항일운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에게 시대적 모순과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실천적 표상이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여성역사인물4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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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3

제주 여성역사인물3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조선시대의 여성인물 강사철 아내 고씨와 홍윤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3

국지

성명: 국지 (國只,, 날아기)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국지는 품관 홍질의 첩인데, 14세에 시집을 가서 남편이 죽자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였으나 주위에서 만류하여 죽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재색을 탐내는 자가 강폭하게 겁탈을 하려고 하자 곧 남편의 형 집으로 거처를 옮겨 평생을 고독하게 수절하였으므로 인조 2년(1624) 5월에 목사 민기가 아뢰어 정표되었다. 비는 조천면 신촌리에 있다.

김천덕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조선 선조 때의 열녀이다. 애월읍 곽지리의 시노비 연근의 아내이다. 선조 때 제주판관 조인후가 제주목사 임진에게 천덕의 효열을 알리자 마침 제주에 왔던 아들 임제가 『김천덕전』을 지어 목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1577년 가문에 정려가 내려졌다. 김천덕은 재색이 있어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남편이 진상물을 싣고 출항 중 화탈도와 추자도 사이에서 침몰되어 익사하였다. 천덕이 3년상을 치르고 삭망과 절기마다 있는 제사 때에 화탈도를 향하여 하늘에 호소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굴렀다. 그 뒤 한 유배인이 그를 꾀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부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곽지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 또 명월방호소의 관리가 권세를 믿고 김천덕의 부친 김청에게 간청해 허가를 받아냈으나 천덕은 통곡하여 목을 매었으나 다른 이의 눈에 띄어 목숨을 구했다. 그러자 두발을 자르고 미친 척하니 천덕의 부친도 강요할 수 없었다. 백호 임제가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하고 아버지인 제주목사 임진에게 알리려고 제주도에 와서『김천덕전』을 지었으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3 김만덕

생존기간: 1739 ~ 9999

인물상세정보

김만덕은 1739년(영조 15년) 구좌읍 동복리에서 김응열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751년 돌림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자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으나 20세에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객주업에 손을 댔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물건을 위탁 판매하는 중간상 역할을 하던 곳으로, 그녀는 상업적 재능을 발휘하여 50대에
이르러 굴지의 재력을 발휘하였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출입하던 사회에서 그녀의 성공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조선 역사상 가장 주목받아야 할 여성사업가가 아닐 수 없다.
1794년(정조 18년) 무렵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제주도민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김만덕은 사재를 털어
육지에서 식량을 사들여 주민들을 구호하는 데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러한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졌고, 정조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때 평민으로서는 예궐할 수 없으므로
왕은 김만덕에게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의 직함을 제수하게 되었다. 이어서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김만덕의 전기는 1797년(정조 21년) 번암 채제공에 의해 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제가·정약용·이가환 등 당대의 쟁쟁한 실학자들이 김만덕의 선행을 기리는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김만덕은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던 변방 제주섬에 사는 천민 신분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사·농·공·상 중 말업(末業)으로
천시되던 상업을 통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재산을 환원함으로써 나라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했다.
그녀는 변방·여성·천민·상업이라는 최말단의 조건에서 국가·남성·양반·관료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했다.
또한 출륙금지령 하에서 제주 여성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육지 나들이뿐만 아니라 임금 알현, 금강산 구경까지 이루어낸
최고 경지의 인간사를 경험했다.
제주여성 김만덕은 제주 역사의 표상이며, 21세기 제주는 김만덕의 정신을 이어받는 문화적 적응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우리 역사에는 후세에 길이 남아있는 여성상들이 있다. 신사임당·유관순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김만덕은 또 다른 여성상, 즉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실현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를 묶는
봉건적 신분의 굴레에 도전했고, 상도(商道)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행에 처한 이웃을 위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인본주의자였다.
따라서 김만덕의 베풂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제주도도청

제주 여성역사인물3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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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2

제주 여성역사인물2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조선시대의 여성인물 강사철 아내 고씨와 홍윤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2

강사철 아내 고씨

  • 성명: 강사철 아내 고씨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고씨는 고산리 강사철의 처이다. 조선 철종 때 차귀 마을에서 출생한 고씨는 19세 되는 해 같은 마을에 사는
강사철과 혼인해 단란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남편이 용수 포구 건너에 있는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거센 풍랑으로 표류하고 말았다.
그의 처 고씨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해 식음을 하지 않고 시체나마 찾으려고 며칠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해안을
배회했다. 끝내 남편을 찾지 못하자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소복을 차려입고 용수포구 속칭 ‘엉덕동산’
숲에서 나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자 홀연히 남편의 시체가 이 바위 나무 밑에 떠올랐다.
고종 3년(1866) 판관 신재호는 고씨가 자결한 바위에 절부암(節婦岩)이라 새기게 하고, 관에서 강사철과 고씨 부부를
합장하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용수리민으로 하여금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만대에 기리게 하였다.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절부암은 열부 제주 고씨의 절개를 기리는 바위다. 이런 사연 때문에 제주를 찾는 신혼부부들은
이곳에 들러 백년해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홍윤애

  • 성명: 홍윤애
  •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홍랑으로 잘 알려진 홍윤애의 가계는 고려 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로 고려시대에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대신을
배출한 높은 문벌이었다. 15세기 초 손자 홍윤강이 제주에 유배 온 이후로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방에서 향리를
지내는 정도로 몰락한 은사(隱士)의 집안이 되었다. 홍랑의 부친은 향리를 지낸 홍처훈으로 입도시조 홍윤강의 13세손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였다. 홍랑은 비록 몰락한 유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어엿한 풍모를
지니게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있었다.
홍윤애가 제주에 유배 온 조정철을 만나게 된 때는 1777년(정조 1)이었다. 조정철의 전 부인 홍씨는 이미 역적으로 몰린
친정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주인 내외는 조정철에게 새색시를 맞아들이도록 주선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싫다고 하면서
단지 심부름 해줄 사람만 구하겠다고 했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고매한 인품과 평소 언동에 대해 익히 듣고 있었으며, 제주에 유배 와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에 자처하여 심부름만 떠맡기로 하였다.
홍윤애는 조정철이 유배된 지 3년이 지나갈 무렵 1779년(정조 3) 겨울부터 적소를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홀아비가 된 젊은 청년이 홀로 있는 죄인의 집에 젊은 낭자가 출입하는 것은 세상의 이목을 끌 수가 있어 밤에
어둠을 타거나 이른 새벽을 이용하여 식사 장만과 빨래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그의 시중을 들었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동경과 존경으로 이루어졌고 은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맺어졌다.
이후 그들은 서로 그리움과 사무침에서 우러나 연인 관계로 진전하여 1781년(정조 5) 2월 30일 마침내 홍랑은
귀여운 딸을 분만하였다. 유배죄인을 사랑한 여인의 생애는 험난하고 천대받는 것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기쁘고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노론 4대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소론파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1781년(정조5) 3월 제주에 부임하였다.
노론파 조정철 집안과는 극한 대립하였던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철을 죽일 뜻을 갖고 죄상을 캐기 시작하였다.
조정철의 죄상이 드러나지 않자 집요하게 염탐하여 그의 적소를 드나들던 홍윤애를 잡아내게 된 것이다.
중략…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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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성역사인물1

제주 여성역사인물1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호빠와 함께 제주 여성역사인물중 탐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여성인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여성역사인물1

탐라시대 여성인물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 공주

  • 성명: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 공주
  • 생존기간: 9999 ~ 9999

상세정보

제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인들로서, 삼신인과 혼인하여 탐라국의 기틀을 잡고 농경문화를 전수한 인간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벽랑국 세 공주는 탐라국의 기원과 연관시켰을 때 건국의 모태가 되었던 제주여성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벽랑국 세 공주는 땅속에서 용출하여 수렵생활만 영위하던 남성 집단에 오곡(五穀)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갖고 들어와
새로운 문화혁명을 일으킨 여성 집단이다.
여기서 여성은 풍요와 생산을 가져다 준 주체로서 제주여성의 생활력과 문화를 전해준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당신화의 주인공 백주또 할망, 제주의 천지창조 설화의 설문대 할망 등에서도 여성의 독보적인
행위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탐라국 개국신화 내용

사람이 살지 않던 아주 아득한 옛날,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이들은 모흥굴,
지금의 삼성혈이라는 굴에서 솟아났는데, 맏이를 고을나, 그 다음을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그들은 용모가
의젓하고 기품과 도량이 넉넉하고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가죽옷을 입고 육식을 했으며, 언제나 사냥을 업으로
삼았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니, 자줏빛 안개가 나무 상자를 감싸고 상자는 해변에 떠내려 와 가지 않았다.
삼신인(三神人)이 산에서 내려와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새 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관대를 갖추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옥함을 지키고 있었다.
옥함을 여니, 그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셋 있었다. 나이는 십오륙 세쯤 돼 보였는데,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고,
기품은 그윽하고 얌전한데, 각자 화장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다. 세 여인이 옥함에서 나온 곳은 온평리 ‘화성개’라는 포구였다.
포구 이름은 이 여인들이 꽃상자 ‘화상(花箱)’에서 나왔다 하여 ‘화성개’라 지었다 한다. 삼신인은 “이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 세 사람에게 내린 것”이라 하며 기뻐했다. 사자는 고개를 두 번 숙여 절하며 말을 했다. “저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님께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시집 갈 나이가 되었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탄식을 하며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고량부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님을 모시고
가라고 명(命)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사자는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사자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 생긴 말의 발자국이 지금도 남았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이다.
삼신인은 곧 깨끗한 ‘희생’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하고 혼례를 올려 ‘흰죽’이라는
굴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고량부 삼신인이 결혼한 연못을 ‘혼인지’라 불렀다.
결혼하여 동굴에서 살던 이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샘물이 맑고 비옥한 땅을 구했고, 땅을 구하자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을 ‘활쏜디왓’이라 하는데,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지방기념물 ‘삼사석’이
그곳이다. 활을 쏘아 고을나가 좌정처로 정한 곳을 일도, 양을나가 정한 곳을 이도, 부을나가 정한 곳을 삼도라 했다.
그로부터 살림을 차려 오곡의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가축을 기르니 날로 풍요를 얻어 마침내 인간 세상 ‘탐라국’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 여성인물

정씨여인

성명: 정씨여인

생존기간: 9999 ~ 9999

인물상세정보

열녀 정씨는 고려 공민왕 때 제주여인이다. 그녀는 목호(牧胡) 석방리보개(石邦里甫介)의 처로서 남편이 공민왕 23년에
일어난 목호의 반기와 이의 평정 와중에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정씨는 사별한 목호 남편 사이에 자식이
없는데다가 젊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탐라에 온 고려의 안무사와 군관들이 강제로 정씨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이에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칼을 당겨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여 강제 결혼을 막았다. 이후에도 정씨는 늙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조선 태종 13년(1413) 안무사 윤임은 정씨가 친족들도 재가를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절개와
부도(婦道)를 지켜서 70세에 이르렀음을 왕에게 아뢰어 열녀로 정표되었다

자료출처 : 박찬식 (제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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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근현대사

제주근현대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근현대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근현대사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이 모두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 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 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관덕정전경 1

고종대로 넘어오면서 1목 2현의 행정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고종 원년(1864)에는 대정현과 정의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17년(1880)에 다시 현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유는 정의ㆍ대정 두 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제주목과 한 등급의 차이밖에 나지 않아 체계가 점차 문란해졌고 또 과거의 폐단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종 32년(1895) 5월에는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전국을 23개소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부(府)를 두었다.
이 때 제주도에는 23부의 하나로 제주부(濟州府)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목ㆍ부ㆍ군ㆍ현의 명칭과 부윤ㆍ목사ㆍ부사ㆍ군수ㆍ서윤ㆍ판관ㆍ현령ㆍ현감 등의 관직 명칭을
모두 폐지하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며, 고을 장관의 벼슬 이름을 군수(郡守)라 한다고 하여, 종래 부ㆍ목ㆍ군ㆍ현 등으로 번잡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을 모두 군(郡)으로 단일화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현ㆍ정의현이 모두 제주군ㆍ대정군ㆍ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제주부의 관청은 제주에 둔다고 하였다.

당시 제주부의 관찰사로는 처음에 경상좌수사(3품)로 있던 이병승(李秉承)이 주임관(2등)으로 임명되었고,
제주부 참서관으로는 외부 주사(外部主事)로 있던 유긍환(兪兢煥)이 주임관(6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때 제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고종 32년(1895) 7월 2일에는 중추원 의관(議官)
오경림(吳慶林)을 제주부 관찰사로 임명하고 칙임관(4등)으로 올렸다. 그리고 건양 원년(1896) 정월에는 제주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으나 동년 5월 4일에 관찰사직에서 면직되었다.
즉, 동년 동일자로 법부 형사국장 이병휘(李秉輝)를 제주부 관찰사로 임명하고 칙임관 4등으로 올렸으며, 5월 6일자로
제주재판소 판사를 겸임케 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23부제는 약 1년이 지나 폐지되고 곧 13도제를 실시하게 된다. 그 이유는 민정의 불편함과 번거로운
폐단이 있고 재정상의 부담도 크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건양 원년(고종 33년, 1896) 8월에는 전국 23부를 13도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제주에는 목사를 두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주는 섬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곤란할 뿐 아니라 나라에서 특별히 덕화(德化)를
베푸는 특수성으로 인해 목(牧)을 설치하여 대정·정의 두 군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다시 1목 2군 즉, 제주목과 대정군·정의군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중략…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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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제주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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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조선시대역사

제주조선시대역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조선시대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조선시대역사

조선시대역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제주목관아전경 1

제주도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1목 2현제가 정립된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호,
인구가 6만 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특히 牛馬賊)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한편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출륙한 제주도민, 즉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에 정착하여 사는 제주도민을 두무악(頭無岳)이라 하였다.
이른바 두무악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제주도의 공물과 부역이 증대되고 관부의
수탈이 격심해지면서 발생하였다.
산물의 부족으로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도민들이 과중한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 전라 연해지역으로 출륙하여 정착한 두무악들은 언어와 습속 등 생활양식의 차이로 그곳 주민들로부터 기피되었고,
또 정부로부터도 치안상 우려되어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이리하여 두무악들은 전복을 따는 일과 같은 진상용 해산물을
채취하여 납부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육지인과는 격리된 가운데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이들 두무악들은 수시로 원주지인 제주도로 추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육지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여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군역을 지면서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중략…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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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려시대역사

제주고려시대역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고려시대역사와 삼별초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고려시대역사

”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원종 11년(1270) 10월말경이었다.
이문경이 거느린 삼별초의 선발대가 명월포에 상륙한 것이다.

삼별초군을 그린 그림 1

고려시대의 제주도는 당초에 군으로 편제되었으나 의종 때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고종 때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다가
충렬왕 21년에 가서는 제주목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제주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고종 때(1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다만 몽골의 지배 때는 제주도가 그들의 직할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탐라ㆍ혹은 탐라국으로 호칭하였었다.
그러나 충렬왕 20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는 다시 제주로 고쳤다. 한편, 고려조정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부터
수탈이 자행되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선정을 남긴 관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란의 주된 요인은 관리의
가렴주구와 토호 권세가의 토지침탈, 조세ㆍ부역의 가중 등을 들 수 있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원종 11년(1270) 10월 말경이었다. 이문경이 거느린 삼별초의 선발대가
명월포에 상륙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도 삼별초의 세력이 제주도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암부사 김수를
보내어 군사 200명으로 제주도를 지키게 하였고, 뒤이어 고여림 장군에게도 군사 7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김수와
합세하게 하였다. 이들 고려 관군이 제주도에 들어온 시기는 삼별초보다 약 한 달 앞선 9월 중순경이었다.
그리고 이 때 삼별초의 입도에 대비하여 보루를 쌓다가 삼별초가 상륙하자, 결국 이들 고려 관군과 삼별초간에
공방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 격전지는 송담천 일대였다. 명월포로 상륙한 이문경이 제주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제원에 진을 치고 송담천에서 관군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그 결과 관군이 패했는데, 그 이유를 《졸고천백》에는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승리한 이문경은 수륙 교통의 요지인 조천포에 거점을
마련하여 비상시에 대비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왔다는 것은 단순히 대몽 항쟁을 전개하고
있는 삼별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겪어온 관리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별초를 도왔던 것이다.

중량…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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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탐라시대역사 소개

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탐라시대와 탐라국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탐라시대역사

탐라국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와 각각 교역한 것으로『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해안가 전경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제ㆍ고구려ㆍ신라와 각각 교역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이 무렵 중국의 《신당서》의 기록에는 “용삭 초년(신라 문무왕 원년, 661)에 탐라(耽羅)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인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황제를 뵙게 하였다. 그 나라는 신라의 무주(지금의 광주직할시)
남쪽 섬 위에 있다.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해서 옷은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만들어 입는다. 집은 여름에는 초가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 들어가서 산다. 땅에서는 오곡이 나지만 밭을 가는 데는 소를 부릴 줄 모르고 쇠스랑으로 밭을 일군다.
이 나라는 처음에 백제에 복속하였다가 인덕 연간(663∼664)에 그 나라 추장이 당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따라
태산에 이르렀는데, 그 뒤로는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기록인 《당회요》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문무왕 1, 661)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 나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물론, 이 두 기록은 작자가 직접 제주도에까지 와서 보고 쓴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워 들은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사 내용에는 그들의 편견도 개재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떻든 위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당시 제주도의 위치, 명칭, 왕, 풍속, 가축, 성곽, 귀신, 거주지 모습, 무기, 인구 등에 대해 대략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중략…

자료/저작권 정보 자료/저작권 정보

고창석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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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선사시대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선사시대역사

선사시대

제주도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속칭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빌레못굴 유적 전경

제주도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속칭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순록과 황곰의 뼈가 발굴되었다. 순록과 황곰은 오늘날 우리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벌판에서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이들 동물들의 뼈가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 옛날에는 제주도가 오늘날과 같이 섬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412호)이 있으며,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 중 제주시 삼양동 선사유적은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개벽신화의 터전인 삼성혈도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제주도는 고대로부터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가 되었던 것이다. 1928년 제주항 축항 공사 때에 인근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ㆍ화천(貨泉) 등의 일괄 유물은 과거 제주도가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로상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는 중국에서 한반도 남쪽을 거쳐 일본 큐슈[九州]로
이어지는 해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과거 유물ㆍ유적의 분포지가 대부분 제주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유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헌상으로 볼 때,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 기록보다는 중국의 역사서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제주도의 경우, 기원후 3세기 중국 삼국시대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州胡)’에 관한 기록이 그 첫 예가 되겠다.

중략…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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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도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도역사

개요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의 석기시대를 알려주는 지석묘와 개국신화의 배경이 되는 삼성혈과 혼인지 전경사진

제주의 옛명칭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三姓)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삼성혈) 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 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명칭)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관계는 그후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에는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할을 하였다.

출처 제주도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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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연혁

제주도연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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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도연혁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도연혁

시기 연혁
상고시대 ∼ 삼국시대  탐라 (탁라)국
938년 (고려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 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고종년대(1192∼1259)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 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 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 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 (태종 16년) 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 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 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  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 도(道)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56년 7월 8일 서귀면·대정면·한림면 각각 읍 승격, 한경면 신설(1시·2군·3읍·10면·14개동)
1979년 5월23일 제주시에 3개동 분할 신설(17개동)
1980년 12월 1일 애월·구좌·남원·성산면 각각 읍으로 승격(1시·2군·7읍·6면·17개동)
1981년 7월 1일 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12동)
1983년 10월 1일 제주시 삼도동 분동
1985년 10월 1일 제주시 용담동 분동, 조천면 읍으로 승격(2시·2군·7읍·4면·31동)
1986년 4월 1일 구좌읍 연평리를 우도면으로 승격(2시·2군·7읍·5면·31동)
2006년 6월 이전 2시·2군·7읍·5면·31개동
2006년 7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출범(2행정시·7읍·5면·31개동)

출처 제주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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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호빠에 관련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Q&A 형식으로 입문편을 한번 마련해봤습니다.

Q. 호빠란 무엇인가요?
A. 유흥주점의 일종으로 남성 접객원들이 고객을 대상으로 술을 접대하는 호스트바를 뜻 합니다.

Q. 정빠? 중빠? 이런건 무엇인가요?
A. 호빠도 고객 대상에 따라 부류가 나누어집니다.
정빠 – 정통 호스트바로 여성 고객만 받는 곳
중빠 – 남, 여 모든 손님을 받는 곳
아빠방 – 30대 이상의 선수들이 있는 곳

Q. 박스가 뭐죠?
A. 한 가게에 여러명의 선수가 일 하며, 이 선수들이 모인 팀을 박스라 일컫습니다.
관련하여 아래 내용도 참고 하시면 됩니다.
선수 – 남성 접객원
마담 – 박스를 이끄는 리더 (일명 메인)

Q. 선수는 키 크고 잘생겨야만 하나요?
A. 아닙니다. 말을 잘 한다거나, 재미있거나,
몸매가 남다르다든지 각자의 매력이 있으면 됩니다.

Q. 급여는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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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인 능력에 따라 부가적으로 팁을 통한 수익도 발생합니다.

Q. 업체들은 어떻게 찾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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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제주역사4

제주도호빠 제주역사4

안녕하세요
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도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삼다도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삼다도.
그 속에는 자연환경을 지혜롭고 억척스럽게 극복해온 제주사람들의 삶의 역사가 담겨있다.

바람 – 바람 잘 날 없는 바람의 나라

태풍의 길목에 자리 잡은 제주는 바람의 섬이다. 태풍 부는 날은 바다에 서면 제주바람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남는다. 제주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이름의 바람을 지닌 곳이 또 있을까.
하늬바람, 높하늬바람, 높새바람, 샛바람, 마파람, 동마파람, 갈바람, 섯바람, 섯하늬바람, 양두새바람, 양바람. 제주사람들은 온갖 이름으로 찾아오는 바람과 싸우고, 맞서고, 비끼고 때로는 달래고, 이용해가며 독특한 바람의 문화를 이루어왔다. 이제 제주바람은 모아지고 가두어져 전기에너지로 태어나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돌 – 돌 없이 상상할 수 없는 돌의 섬

돌을 빼놓고는 제주를 상상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 제주는 섬을 이루고 있는 땅과 산은 물론이고 섬을 빙 두른 해안선까지 온통 돌투성이인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일구며 살아야 했던 옛 제주사람들은 한 평생을 돌 속에서 돌과 더불어 살다가 돌 속으로 돌아갔다. 특히 손으로 일일이 쌓아 두른 돌담을 눈여겨보자.
집 어귀의 ‘올렛담’, 집 울타리인 ‘울담’, 밭을 두른 ‘밭담’ 바다밭의 돌그물인 ‘원담’, 무덤을 두른 ‘산담’이 다 돌담이다. 어찌 그것뿐이랴. 읍성 ∙ 현성 ∙ 진성 등의 성을 두른 ‘성담’도, 외침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두른 ‘환해장성’도 다 돌담이었다. 제주돌담속에는 제주의 삶과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는 것이다. 제주돌담의 총길이는 36,000천여 킬로미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이다. 지구본에서 조그만 점에 불과한 섬 안에 그토록 긴 돌담이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자 – 여신의 나라, 여자의 섬

제주섬은 여신의 나라다. 창조의 신 설문대, 생명의 신 삼승, 바람의 신 영등, 농경의 신 자청비, 운명의 신 가믄장아기 등 제주섬의 중요한 신들은 물론 마을을 관장하는 당신, 집안을 다스리는 가신들도 거의 여신들이다. 제주는 여신의 나라인 것이다. 제주섬에는 왜 여신이 많은 것일까? 인류사의 기원이 담긴 초기신화의 원형이 남아있기 때문이고, 척박한 환경과 거친 역사속에서도 주체적으로 꿋꿋하게 삶을 이끌어온 제주여성들의 능동적인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는 사람도, 밭에 나가 김을 매는 사람도, 장터에 나가 장사하는 사람도, 땔감을 구하고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도 여성들어었으니 어찌 ‘여다의 섬’으로 비쳐지지 않을 것인가. 여다의 섬, 그 이름은 여성들이 중심되어 이어온 제주 섬의 오랜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비짓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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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빠알바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도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제주도의 의식주 문화는
특별합니다

제주도의 자연과 독특한 생활문화가 깃들어 있는 전통 살림집, 각종 생활도구들과 음식
그리고 전통 의복에 이르기까지 제주만의 빛깔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의(衣)

갈옷

풋감을 즙으로 만들어 염색한 옷, 처음에는 황토빛을 띠며 뻣뻣하지만 입을수록 갈색이 되고 부드러워진다. 더러움이 덜 타고 땀이 배지 않아 노동복으로 그만이었다.

물옷

1970년대 초기 일본에서 검은 고무옷이 들어오기 이전에 제주 해녀들이 물질할 때 입던 옷. 상의인 물적삼, 하의인 물소중이, 머리에 쓴 물수건이 포함된다.

정당모자

야산에서 자생하는 댕댕이 줄기로 만든다. 모자골은 사용자의 머리에 맞게 하고, 갓은 비교적 넓게 만들어 해를 많이 가릴 수 있도록 했다. 주로 목자나 농부들이 사용하였다.

출처: 비짓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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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도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제주의 민속

본도와 제주는 자연과 문화, 언어 등이 다르다.
제주에는 “당”과 “굿” 이라는 무속신앙이 독특한 문화로 남아 보전되고 있다.

당. 마을을 수호하는 신(神)이 사는 집

제주에는 마을마다 신들이 거처하는 장소인 당(堂)이 있다. 마을을 수호하고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을 모신 성소이며 제사장소다. 마을의 설촌 역사를 간직한 본향당, 아이들의 성장과 건강을 돌보는 일뤠당, 해녀와 어부들의 바다일과 관련된 돈짓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마을은 7~8개소까지, 최소한 한 개소 이상은 지니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아직도 400여 개소의 당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 구경을 하고 싶다면, 어느 마을이건 그 마을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조용히 둘러볼 것.


굿. 1만8천 신들과 인간이 만나는 축제

무격(巫覡)을 둘러싼 주술종교의 모든 민속인 ‘무속(巫俗)’은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이며 우리 민족문화의 근원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다. 1만8천 신들의 고향답게 제주에는 풍부한 무속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무속이 바로 ‘굿’이다. 굿을 집행하며 신과 인간의 매개 역할을 하는 ‘무당’을 제주에서는 ‘신방’이라 부른다. 신방들이 하는 의례는 기회나 규모, 형식 등에 따라 일반굿과 당굿, 비념 등으로 나뉜다. ‘일반굿’은 가정에서 생사, 질병, 생업, 계절 등을 관장하는 신들을 청해 축원하는 가제(家祭)이고, ‘당굿’은 마을을 수호하는 당신에 대해 마을사람들이 합동으로 당에서 하는 마을제다.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된 칠머리당영등굿이다.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에서 마을 수호신인 본향당신을 모시고 마을사람들이 하는 당굿이며, 영등굿인 칠머리당영등굿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어 그 진가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소중하고 귀한 굿이 매년 음력 2월 1일과 14일에 사라봉 어귀에 자리 잡은 칠머리당에서 치러지고 있으나 일부러 시간 내어 동참해볼 만하다.

신구간. 신화가 살아있는 제주만의 독특한 풍속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섬에도 신들이 자리를 비우는 유일한 기간이 있다. 바로 24절기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 후 4일부터 첫 절기인 ‘입춘’ 전 3일까지의 8일 동안이다.
제주에서는 그 기간을 ‘묵은 철과 새 철의 사이’라는 뜻의 ‘신구간(新舊間)’이라 부른다. 24절기, 곧 음력이 아니라 양력에 토대를 둔 것이니 매년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그 기간이다. 제주에서는 신구간에 지상의 모든 신들이 천상으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1년 동안 인간세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결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들이 없는 신구간에 평소에는 동티날까 두려워 못했던 이사, 집수리, 변소개축, 이장 등을 해도 괜찮다는 것. 그 속신이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제주에는 신구간에 집수리를 하거나 이사하는 집이 많다.


포제단. 제주에서 마을별로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벌이는 곳

마을 남성들이 주관하여 유교식으로 거행하는 마을제를 포제라 하고, 이 포제를 행하는 장소가 바로 포제단이다. 여성들이 주관하는 무속제의인 당굿도 병존하고 있다.
당굿과 포제는 원래 하나였던 것인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식 의례가 도입되면서 남성 주도의 포제로 분화되었다.

출처: 비짓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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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제주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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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재미있고 신비로운 제주탄생의 설화

태초의 세상이 열린 이야기, 개벽신화

오랫동안 세상은 그저 암흑이었습니다.
어둠과 혼돈으로 휩싸인 암흑천지에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어요.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 머리가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열리며 미세한 금이 생겨났습니다.
금이 점점 벌어지는 동안 땅이 솟아 오르고 물이 흘러내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조금씩 분명해져 갔어요.
이때 하늘에서 푸른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 검은 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쳐지고 트이면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답니다.
별이 가장 먼저 생겨났대요. 동쪽에 견우성, 서쪽에 직녀성, 남쪽에 노인성, 북쪽에 북두칠성,
중앙에 삼태성이 돋아나자 많은 별들이 속속 돋아 펼쳐지며 하늘 가득 자리를 잡았습니다.
별빛만으로는 아직 어두웠어요. 그저 어두운 채로, 동쪽에선 푸른 구름이, 서쪽에선 하얀 구름이,
남쪽에선 붉은 구름이, 북쪽에선 검은 구름이, 중앙에선 누런 구름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어느 순간,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어요.
이때 하늘에서 천지왕이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을 내보내자, 세상이 밝아지며 천지가 활짝 열렸다는군요.

제주섬이 빚어진 이야기, 설문대 전설

옛날 옛적에 몸집이 아주 큰 설문대 할망이 있었답니다. 설문대 할망은 힘 또한 장사였는데,
어느 날 치마폭에 흙을 가득 퍼 날라다 넓디넓은 푸른 바다 한가운데 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날라다 부었는지 바다 위로 섬의 형체가 만들어졌지요.
저절로 만들어진 오름들이 보기 좋았는지, 설문대는 흙을 집어 섬 여기저기에 오름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흙을 너무 많이 집어놓았다 싶은 것은 주먹으로 봉우리를 탁 쳐서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봉우리가 움푹 파인 오름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드디어 섬 한가운데에 은하수를 만질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한라산이랍니다.
그런데 산이 너무 높아 보였는지, 봉우리를 툭 꺾어 바닷가로 던져버렸습니다.
남서쪽 바닷가로 날아간 그 봉우리는 산방산이 되었답니다.
– 제주신화에서의 ‘할망’은 ‘여신’을 일컬음 –

탐라국이 생겨난 이야기, 탐라개국신화

한라산 북녘 기슭 땅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더니 땅 속에서 세 신인이 차례로 솟아났습니다.
세 신인은 거친 산야에서 사냥을 해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답니다.
어느 날 동쪽 바닷가에 커다란 상자 하나가 떠 내려와 머무는 걸 발견하고 달려갔어요.
그것은 자줏빛 흙으로 봉해진 나무상자였습니다.
상자를 여니,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새알 모양의 옥함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옥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아리따운 처녀 셋과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앗이 있었답니다.
상자에서 나온 남자는 “나는 동해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세 따님을 두셨는데, 삼신인이 솟아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니, 모시고 가라해서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을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 말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세 신인과 공주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차례로 짝을 정해 혼례를 올린 뒤,
물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가 차례로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정했습니다.
이때부터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풍요로워져 마침내 ‘탐라국’을 이루게 되었답니다.

출처: 비짓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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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도민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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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도민헌장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도민헌장

제주도 승격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주도민헌장을 제정 선포하였음을 공고합니다.

우리 제주특별자치도민은 유서 깊은 탐라의 역사와 전통의 계승자이며 천혜의 아름다운 땅 제주의 주인이다.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자산을 소중히 지켜 나가며 새로운 제주시대를 창조하고, 세계화의 주역이 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 하나우리는 거친 풍파와 고난의 삶을 이겨낸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복지 낙원을 이룩한다.
  • 하나우리는 환경을 깨끗하게 보전하고 쾌적한 생활의 터전을 가꾸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 하나우리는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 향기로운 새 문화를 꽃피우기 위하여 정성을 다한다.
  • 하나우리는 자립정신으로 공익 우선의 사회를 지향하고 제주인의 자존을 지켜나간다.
  • 하나우리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이 되고, 세계로 뻗는 평화의 섬으로 가꾼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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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제주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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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의 상징들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죠~

제주를 상징하는 꽃 – 참꽃
각박(刻薄)한 땅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며 봄철 초록빛 숲 속에서 타는 듯한 붉은 꽃을 무더기로 피우고 있는 참꽃은 제주특별자치도민의 불타는 의욕과 응결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잎은 가지 끝에 세 잎씩 윤생하여 제주의 자랑인 삼다, 삼무, 삼보, 삼려를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세잎과 다섯 꽃잎이 규칙적으로 족생(簇生)하여 삼삼오오 즉, 도민들의 단결과 질서, 평화로운 발전을 향한 밝은 전진적 기풍을 상징한다.
학명 : Rhododendron weyrichii Maxim.

제주를 상징하는 나무 – 녹나무
녹나무는 제주특별자치도민의 특성과 기질과 신앙을 상징하고 있다.
각박한 땅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한 이 나무는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주특별자치도민의 근면, 소박, 인내심을 상징하며 언제나 그 싱싱함을 잃지 않는 상록수일 뿐만 아니라 봄에 새 잎이 날 때는 그 잎이 붉은 꽃과 같이 화려함은 도민의 희망과 정열과 무궁한 번영의 기상을 보여준다.
나무와 잎에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는 도민의 높은 품위와 슬기롭고 풍부한 정감을 보여주며 짙은 향기가 사귀를 몰아낸다는 전설은 부정과 불의와 불법에 타협하지 않고 의지와 실천을 앞세워 살아온 제주특별자치도민의 얼이 깃든 신앙의 나무이기도 하다.
학명:Cinnamomum camphora (L) Siebold

제주를 상징하는 새 – 제주큰오색딱따구리
제주큰오색딱따구리는 활엽수의 노거수 교목림에 많으며 제주특별자치도에 분포하는 종으로 소형이며 암색이다. 머리와 등면은 큰오색딱따구리와 거의 같으나 다만 아래등과 허리의 백색이 적다. 그리고 아래면의 세로난 무늬가 넓고 바깥쪽 꼬리 깃에 완전한 흑색 띠가 3줄 있다. 그러나 턱 아래 가슴의 바탕색은 연한 황백색이며 산림해충을 구제하는데 유익하다.
학명: Dendrocopos leucotos quelpartensis

제주를 상징하는 색 – 파랑
제주특별자치도는 온통 푸르다. 푸른 바다, 푸른 산, 푸른 하늘과 더불어 사는 도민의 푸른 마음을 나타내어 불멸, 번영, 진취, 무궁한 발전을 상징한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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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호빠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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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빠 No.1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간단히 호빠용어에 대해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풀티씨
풀티씨는 줄여서 풀티라고도 부른다.
말그대로 시간 상관없이 손님이 갈때 까지 논다.
하지만, 시간 진상이 많아 요즘은 3시간으로 정해놓고 있다고 한다.

티씨(T/C)
선수들이 손님을 접대하고 받는 기본 봉사료를 티씨라 부른다.
그래서 선수들은 TC를 챙기려고 노력해서 초이스 당하려고 하는것이고
더 열심히 해서 팁을 받으려고 하는것이다.

뺀찌
손님이 선수가 마음에 안들면 보내는건데,
그걸 뺀찌 놨다고 표현한다.
캔슬? 강퇴? 뭐 이렇게 해석하면 될것 같다.

메이드
선수가 초이스되어서 방에 들어가는걸 메이드라고 한다.

초이스
손님이 옆에 앉힐 선수를 고르는걸 초이스라 부른다.
선수들은 초이스를 당해야만이 돈이 생기기 때문에 열심히 자기소개를 한다.
하지만, 얼굴 잘생기면 장땡

보도
가게에 상주한 직원이 아닌 가게 없이 사무실 소속 직원을 이야기 한다.
주로 가게에서 콜이 들어오면 차를 타고 가서 일을 한다.

새끼마담
줄여서 새마 라고 하는데,
마담이 바쁠때 새끼마담이 마담역활을 해준다.
학교로 따지면 반장,부반장 개념이라 생각하면 편할것 같다.

마담
박스를 관리하는 리더 라고 보면 될것 같다.
메인,실장 다 똑같다고 보면 되는데,
간혹 다르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긴 하다.
거기 까지 알기엔 너무 깊숙히 들어가니까 이정도만 알고 있자

박스
호스트접대부, 한명한명을 선수라 부른다면,
그룹으로 묶어서 박스라고 부른다.
팀,조 라고 생각하면 쉬울것 같다.

선수
20대초중반으로 형성된,
호스트바의 손님 접대부 한명한명을 선수라 부른다.

아빠방
일반 호빠 선수들은 20대 초중반으로 어린 친구들 이지만,
아빠방의 선수들은 30초반부터 40대 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만나볼수 있는곳이 아빠방이다.

중빠
게이 손님들이 오는 게이빠

정빠
정통호스트바의 줄임말로 호빠중에 급이 제일 높은 호빠를 말한다.
그 이하로 퍼블릭, 디빠 순으로 나뉘지만 요즘은 다 비슷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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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변경된 실내·외 마스크 착용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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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주도호빠입니다.
오늘은 변경된 실내·외 마스크 착용 지침에 대해 한번 알아볼까 합니다.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항상 착용해야 하며,
실외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착용해야할 장소에 한해
착용을 해야한다네요

실외 의무 착용장소는 타인과 2m이상 거리 유지가 되지 않는 경우나
실외에서도 집회, 공연, 행사 등 다중이 모이는 경우에는 마스크 착용 필수!!

예방 접종자 경우 예외가 될 수 있는 상황도 있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의무 착용이란것 잊지 마세요~

만약 의무 착용 장소에서 위반 할 경우
과태료가 부과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시설·장소 관리자·운영자에게는 300만원 이하, 위반 당사자에게는 10만원 이하의 과태료!!
그런데 어긴 사람 과태료가 더 적네요 ㄷㄷㄷ
관리자·운영자 여러분들 고생 많으실 듯 합니다.

다들 서로간 매너와 의무 사항을 지키면서
코로나를 극복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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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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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호빠 홈페이지가 오픈되었습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 바랍니다.
보다 나은 정보들을 고객 여러분들에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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